산소통 고장난 채 출동한 119 헬기…10세 여아 큰일 날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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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옮기려고 119 헬기에 탔던 10세 여자아이가 정작 헬기 내 산소 공급 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생명을 잃을 뻔한 일이 벌어졌다. 이는 환자 어머니 고모씨가 지난 12일 전북도청 누리집 민원 게시판에 “억울한 의료사고를 당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호흡부전 심각…탑승했다 내려
한때 의식불명, 다음 날에야 이송
헬기대원 4명 모두 장비 이상 몰라
소방본부 “병원에도 잘못 있어”

고씨의 초등학교 3학년 딸 A양은 지난 2일 갑자기 경기를 일으켜 전북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급성 호흡부전(폐부종)과 패혈증이 심각했다. 여기에 충수염까지 발견돼 고씨 부부는 딸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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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달은 A양을 이송하는 날 터졌다. 전북대병원은 지난 7일 오전 11시46분쯤 전북소방본부에 헬기를 요청했다. 전북소방본부는 2분 뒤인 11시48분쯤 국민안전처 산하 중앙119구조본부에 대체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북소방본부 헬기는 점검차 경기도 김포의 정비업체에 입고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북소방본부는 병원 측에 “헬기가 오후 1시10분에서 20분 사이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통보했다. 하지만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발한 ‘수도권 119 특수구조대 3호 헬기’는 오후 1시29분에야 전북대병원 헬기장에 착륙했다. 앞서 약속 시간에 맞춰 오후 1시8분쯤 헬기장에 도착해 기다리던 전북대병원 주치의와 인턴 등 의료진과 고씨 부부는 호흡곤란으로 힘겨워하는 A양을 지켜보며 ‘피 말리는 21분’을 버텨야 했다. 119 헬기와 병원 간 ‘전달자’ 구실을 해야 할 전북소방본부 측이 헬기 도착 지연 사실을 전북대병원 측에 다시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119 헬기에 있는 산소통은 빈 통이었고 전북대병원에서 준비한 산소통도 탑승 전 바닥났다”는 게 고씨의 주장이다. A양이 헬기에 올랐지만 산소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바로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헬기엔 조종사 2명과 정비사 1명, 구급대원 1명 등 모두 4명이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헬기 내 산소통에 이상이 있는지 몰랐다. 구급대원이 5~10분간 허둥대는 사이 A양은 입에 거품을 무는 등 발작을 일으켰다.

의료진이 다시 병원에서 산소통을 가져왔지만 소용없었다. A양은 결국 의식을 잃었고, 다시 응급실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헬기 도착 전 산소 마스크를 낀 상태에서도 간단한 대화와 자가 호흡이 가능했던 A양은 기관지에 인공호흡기를 삽입한 후에야 숨을 쉴 수 있었다.

A양은 사고 이튿날(8일) 구급차로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 지난 16일께 의식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 고씨는 “저희 딸은 산소 공급이 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아이”라며 “산소통을 확인도 하지 않은 병원과 산소통이 비어 있는 119 헬기가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방119구조본부 관계자는 “당시 헬기 안 산소통엔 6시간 분량의 산소가 있었지만 산소를 공급하는 연결 부위 이상으로 산소가 샜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재조립하는 데 5~10분이 걸렸다”며 장비 결함을 인정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전북대병원 측도 헬기 이송 전 산소가 떨어진 부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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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병원 측은 “당시 A양을 옮겼던 이동식 침대에 달린 산소통에는 산소가 충분했고 의료진의 조치도 적절했다”며 “단지 환자의 산소 포화도가 기준치 이하로 떨어져 수동식 인공호흡기인 앰부백(ambu-bag)을 함께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우성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투명사회국장은 “소방본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다루는 기관인 만큼 언제나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평소 장비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며 “이번 사고는 아직도 현장에선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일선 담당자들의 인식도 안이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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