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합집산" 거듭한 85년 재계|「국제」해체부터「부실」정리 "유예"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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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5년 재계는 국제그룹 해체라는 메거톤급 사건으로 연초부터 뒤숭숭했다.
l8개 계열그룹을 거느린 84년 매출 국내 8위의 재벌이 2·l2총선이 끝나기 무섭게 하루아침에 생체분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재계는 아연실색했다.
기업이 어느 정도 커지면 정부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고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던 터라 국제해체 통고는 그 충격파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제그룹의 해체는 국내랭킹 8위의 재벌을 재계지도에서 지우고 단위기업을 쪼개 팔아치우는 것이기 때문에 재계판도에 변화를 초래했다.
한일합섬은 국제상사의 신발·무역부문과 제주 하이야트호텔, 통도사골프장 등을 인수, 국내최대의 경공업체로 떠올랐다.
또 동국제강도 연합철강과 국제종합기계를 맡아 일약 철강업계의 강자로 떠올랐으며 극동건설은 국제상사의 건설부문을 맡아 적어도 외형상 덩치를 크게 부풀리게 됐다.
하나같이 작은 규모의 기업이 자기 몸체보다 더 큰 기업을 떠안은 격이라는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

<몸체보다 더 큰 기업|작은 기업이 떠맡아>
이밖에 국제그룹의 계열사들 중 동서증권은 제일은행으로, 국제제지는 아세아시멘트로, 원풍산업과 국제기술개발은 우성건설로, 조광무역은 서우산업으로, 국제방직은 동방으로 각각 주인이 갈렸다.
국제해체의 충격이 워낙 커서 뒤이어 정리대상으로 올라있던 몇몇 기업들은「짐행유예」 라는 행운(?) 을 잡기도 했다.
몇 년 째 잠자고있는 부동산경기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도산을 불러왔다.
땅을 사고 집을 지어놓기만 하면 돈벌던 시절과는 달리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사무실과 상가 등이 남아돌면서 부동산재벌을 꿈꾸던 몇몇 기업들은 충분한 자산이 있으면서도 하루아침에 부도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름해 흑자도산.
여의도백화점(김희수)·한일상공(정철신)·오대양건설(강정룡) 등이 그것.
이중 여의도백화점은 일부 부동산을 팔아 축소재생에 들어갔지만 한일상공은 진로로 넘어갈 것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고 오대양건설은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
국제그룹해체도 근인을 보면 완매자금 등 비싼자금을 들여 무리하게 지은 그룹사옥서 비롯됐다 치면 요즘의 부동산투자는 무리가 통하던 예전과는 달리 「몰락의 첩경」쯤으로 변한 느낌.
올 기업판도에서 주목할만한 변화 중 하나는 한국화약의 급격한 부상.
괜찮은 업종에서 무리하지 않고 탄탄한 사업기반을 다져오던 한국화약이 올해 정아그룹(구 명성그룹)과 한양유통을 인수하면서 갑자기 재계 전면에 부상했다.
레저산업의 밝은 장래성, 전국에 걸쳐있는 방대한 부동산 등으로 국내 유수 재벌들이 서로 눈독을 들이던 정아그룹을 한국화약이 통째로 넘겨받음으로써 재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사실 한때는 정아의 레저시설들을 지역별로 나눠 연고지 기업에 분할매각 하겠다는 방침이 굳어지기도 했던 터라 한국화약의 「일괄인수」는 한국화약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화약의 「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양유통을 인수함으로써 다시한번 과시됐다.
해외건설에서의 실패로 한양그룹의 축소정비는 벌써부터 기정사실화 됐던 것이기는 하지만 한양그룹 내에서 가장 실속 있는 한양유통만을, 그것도 적잖은 경쟁사와의 경합을 물리치고 따낸 한국화약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부실기업 정리가 일종의 「떼어넘기기」식으로 이루어져온 우리풍토에서 한해에 가장 실속 있는 2개 물건을 한손에 거머쥔 힘은 앞으로 재계판도에 상당한 변화를 몰고올 가능성을 엿보이고있다.
한편 두산그룹은 연말막바지에 호남지방 주류업계의 노포 백화양조를 인수, 업계판도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올들어 조선·건설·섬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산업이 죽을 쑨데 비해 놀라운 신장세를 보인 업종과 기업을 꼽는다면 단연 자동차의 현대자동차가 돋보였다.
캐나다 시장에서 진출 18개월만에 일본 승용차를 따돌리고 업체별 판매1위로 올라선 현대자동차는 이 여세를 몰고 미국시장 공략을 적극화하고 있다.

<경쟁사경합 물리쳐 재계 부러움 사기도>
당초 계획보다 다소 늦어져 내년 초에나 미국내 판매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차의 미 시장상륙은 벌써부터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동차업계는 올해 좋은 뜻으로 매우 분주했는데 현대 외에도 기아는 봉고시리즈의 계속된 히트와 미포드·일마쓰다와의 합작 등으로 기세를 떨쳤다.
올해 국내 4대그룹은 대우가 김우중회장의 친정체제를 강화한 것 이외에는 경영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불황의 늪에서 서슬퍼런 문책보다는 조직의 단결과 효율화가 강조됐던 느낌이다.
올해는 몇몇 재계인물들이 세상을 떠났다.
김용주 전방회장과 최준문 동아건설 명예회장이 세상을 떴고 해태그룹의 창업자중 하나인 민후식회장과 2세의 내분을 목도해야했던 진로그룹의 창업자 장학엽회장도 눈을 감았다. <박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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