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4>|제84화 올림픽 반세기 김성집<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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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올림픽과 2년 격년으로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과 화합을 다지는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 게임)가 열린다.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도등 아시아 13개국이 주동이 돼발족된 아시안 게임은 l회대회를 1950년 열기로 했으나 준비가 늦어져 이듬해 3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막됐다.
그러나 한국은6·25동란을 치르느라 1회대회엔 참가하지 못했다.
아시안 게임의 모체는 극동선수권대회로 1913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1회대회를 개최한뒤 10회 대회를 치르고 해체됐다.
한국이 첫 출전한 아시안 게임은 1954년 제2회 마닐라대회(5월1∼9일).
6·25후 외화 사정이 극히 어렵던 때여서 논란을 벌인 끝에 8개 경기종목중 6개종목 (육상·역도·복싱·레슬링·축구·농구) 에만 81명으로 선수단 (단장 이상백·임원·심판22명, 선수 59명) 을 구성, 파견했다.
18개국 선수 7천여명이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서 기량을 겨룬 결과 한국은 금 8, 은 7,동 5개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종합우승은 금 38, 은 36, 동 24개를 따낸 일본이 차지했고 주최국 필리핀은 금 15, 은14, 동 18개로 2위였다.
한국의 금메달 8개중 5개는 역도에서 나왔는데 이 성적은 우리 팀의 절묘한 작전에서 얻어진것이었다.
당초 우리 역도는 7개 체급중 미들 헤비급과 헤비급을 제외한 5개 체급에 8명이 출전키로 하고 페더급·라이트급·미들급등 3체급엔 2명씩을 선발했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역도 강국 이란이 국내정변으로 불참했다.
이에따라 우리 팀은 체급을 올려 참가 종목을 늘려도 우승이 가능하다고 판단, 체중 늘려기 작전을 시작했다.
라이트급의 김창희는 미들급으로, 미들급의 나는 라이트 헤비급으로, 라이트 헤비급의 고종구는 미들 헤비급으로 각각 한체급씩 올리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몸무게 늘리기도 쉽지않았다.
별수 없이 계체량 직전 나는 3홉들이 오린지 주스 5병, 고종구는12병을 마시고 한계 체중을 넘어섰다.
결국 체중을 올린 3명과 유인호 (밴텀급), 조봉직(라이트급)등 5명이 금메달읕 따냈던 것이다.
그밖의 종목에서는 헬싱키 올림픽·마라톤에서 쓴잔을 마셨던 최윤칠과 최충식이 육상 1천5백m와 1만m에 각각 출전, 금메달을 따내 장거리 종목을 석권했다(마라톤 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한편 복싱에서는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린 박금현이 금메달을 따냈고 헬싱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강준호는 1회전에서 어이없이 탈락, 희비가 엇갈렸다.
월드컵 축구 (5회·스위스) 본선진출이 확정됐던 우리 축구팀은 결승에서 자유중국에 5-2로 패배, 은메달에 머물렀다.
우리 축구는 그해 6월 월드컵본선에서 형가리와 터키에 대패한뒤 32년만에 내년 멕시코월드컵티킷을 따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귀국후 우리 선수단은 경무대로 초청을 받아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개선 축하를 받은뒤 『4년후엔 꼭 일본읕 눌러야 한다』 는 격려의 말을 듣던 생각이 난다.
나는 당시 35세로 서울로 복귀한 휘문학교의 교감 자리를 그만 두고 대한중석에 입사 (53년), 후배를 육성하고 있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뒤 나는 그해 제2회 서울시문화상(체육부문) 을 수상하는 영예도 함께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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