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빛가람 깜짝쇼, 한국 축구 자존심 지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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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빛가람(가운데)이 5일 체코 프라하의 에덴 아레나에서 열린 체코와의 A매치 평가전에서 프리킥을 성공시킨 뒤 주세종(왼쪽), 손흥민(오른쪽)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3년 9개월만에 태극마크를 단 윤빛가람은 1골·1도움을 기록해 슈틸리케호의 2-1 승리를 이끌며 ‘패스마스터’의 귀환을 알렸다. [프라하(체코) AP=뉴시스]

한국 축구가 스페인전 대패의 악몽을 씻고 값진 승리를 거뒀다. ‘슈틸리케호 신입생’ 윤빛가람(26·옌볜 푸더)을 앞세워 유로2016 본선을 앞둔 동유럽 강호 체코의 출정식 잔칫상을 엎었다.

세계 30위 체코와 평가전 2-1 승리
3년9개월 만에 태극마크 윤빛가람
전반 26분 프리킥골로 기선제압
14분 뒤 석현준 골 도움까지 활약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0위 한국은 5일 체코 프라하의 에덴 아레나에서 열린 체코(30위)와의 맞대결에서 1골·1도움을 기록한 윤빛가람의 맹활약을 앞세워 2-1로 승리했다. 지난 2일 스페인(6위)전 1-6 완패의 그림자를 털고 유럽 원정 A매치 2연전을 1승1패로 마무리했다. 한국은 거스 히딩크(70·네덜란드) 전 감독 시절이던 지난 2001년 체코에 0-5 완패를 당했던 아픔을 멋지게 설욕하며 5경기만에 체코전 첫 승(1승3무1패)을 신고했다.

윤빛가람이 전반 26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기분 좋은 승리의 첫 단추를 뀄다. 상대 아크 오른쪽에서 얻은 프리킥 찬스에서 오른발 직접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날카롭게 휘며 골대 오른쪽 상단을 향해 날아간 볼은 상대 골키퍼 페트르 체흐(34·아스널)의 손끝에 맞고 골대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스페인전 당시 상대 미드필더 다비드 실바(맨체스터시티)가 터뜨린 프리킥 골을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득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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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빛가람(左), 석현준(右)

전반 40분에는 윤빛가람이 상대 플레이메이커 토마시 로시츠키(36·아스널)에게서 빼앗아 패스한 볼을 공격수 석현준이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추가골을 뽑았다. 한국은 후반 1분 체코 미드필더 마렉 수히(28·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중거리 슈팅이 수비수 곽태휘(35·알 힐랄)의 다리에 맞고 굴절돼 한 골을 내줬지만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다.

울리 슈틸리케(62·독일) 축구대표팀 감독의 ‘뽑기 축구’가 또 한 번 통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달 23일 유럽 A매치 2연전에 나설 20명 엔트리를 발표하며 윤빛가람을 깜짝 발탁했다. “부상을 당한 구자철(27·아우크스부르크)의 공백을 메워줄 좋은 선수라 생각한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윤빛가람이 태극마크를 단 건 지난 2012년 9월 우즈베키스탄과의 브라질월드컵 예선 이후 3년 9개월만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선수 점검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혔다. 유럽은 물론 중국과 일본, 중동까지 두루 살피며 대표팀에 어울리는 자원을 살폈다. 슈틸리케 감독은 올해만 옌볜을 두 차례 방문해 윤빛가람의 경기력을 점검한 뒤 ‘합격’ 판정을 내렸다. 스페인전 대패로 팀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은 상황에서도 윤빛가람을 선발 명단에 포함시키며 힘을 실어줬다.

감독의 신뢰에 윤빛가람은 두 개의 값진 공격포인트로 보답했다. 윤빛가람은 ‘한국 축구를 이끌 패스마스터’로 각광 받다 어느 순간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날 빛나는 활약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윤빛가람은 2010년 8월 A매치 데뷔전 데뷔골(나이지리아전)과 K리그 신인왕, 2011년 1월 이란과의 아시안컵 8강전 결승골 등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지만, 2012년 스코틀랜드 명문 레인저스 이적이 무산된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경남 FC를 시작으로 성남 FC, 제주 유나이티드를 거치며 잊혀진 선수가 됐다.

그는 올해 초 중국 수퍼리그 옌볜 푸더로 이적한 직후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인으론 흔치 않은 네 글자 이름을 본 옌볜 구단 관계자들이 “일본계 선수 아니냐”며 농담반 진담반 질문을 던진 게 윤빛가람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한국에서 국가대표까지 경험한 나를 일본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투지가 생겼다. 경기력을 키워 반드시 국가대표에 컴백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면서 “생각보다 일찍 기회가 찾아와 기쁘다”고 말했다.

윤빛가람은 4년만에 출전한 자신의 15번째 A매치에서 득점포를 터뜨리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지난 2011년 1월 이란과의 아시안컵 8강전 득점 이후 65개월만에 기록한 A매치 골이었다.

윤빛가람의 부활 못지 않게 슈틸리케 감독의 뚝심도 빛났다. 앞선 스페인전 대패에도 불구하고 슈틸리케 감독은 공격적인 선수 구성과 전방 압박 위주의 플레이를 고집했다. 선수들에게는 “체코는 스페인에 비해 해볼 만한 팀이다. 마음껏 즐기면 이길 수 있다”고 격려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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