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트 “한국, TPP 가입하려면 무역·노동 개선할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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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왼쪽)가 1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찬 강연회에서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장과 함께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리퍼트 대사는 이날 한·미 FTA의 완전 이행을 촉구했다. [사진 최정동 기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완전 이행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 경제관계의 핵심 기둥인 한·미 FTA는 매우 수준 높은 협정으로 세계적 부러움을 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이행되고 있지만 때때로 매우 느리게 이행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경제연구원 조찬강연서 발언
“FTA 이행 느려 사업하기 어려워
한국엔 자동차 좌석 크기 제한 등
세계 어디에도 없는 규제 많아
박 대통령이 지적해도 안 변해”

리퍼트의 발언은 한·미 FTA 발효 후 미국의 대한국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데 대한 미국 내 불만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강연에는 미국대사관 측의 초청으로 송인창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자유무역협정교섭관, 천준호 외교부 양자경제외교국장 등 통상 관련 부처의 간부들이 참석했다. <본지 6월 1일자 1, 3면>

리퍼트 대사는 1일 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 사공일) 주최로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찬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2~4일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의 방한을 앞두고 나온 발언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쓴소리도 쏟아냈다. 먼저 한·미 FTA의 이행이 느리다면서 법률시장 개방을 예로 들었다. 그는 “법률서비스가 완전히 개방되면 일자리와 소비자의 선택지가 늘어나고 무엇보다 법률 비용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한·미 FTA는 2017년 법률시장 개방을 목표로 국내외 로펌의 합작 법인 설립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합작 법인의 외국인 지분율·의결권을 49%로 제한하고, 송무와 공증·노무·지적재산권 관련 업무는 제외했다. 리퍼트 대사는 지난 1월 국회를 방문해 이 같은 제도가 한·미 FTA 합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는 지난 2월 법 개정안을 그대로 처리했다.

리퍼트 대사는 규제개혁도 강조했다. 그는 “한·미 FTA가 완전히 이행돼도 양국 경제협력의 가능성을 전부 이끌어내는 데는 부족하다”며 “한국은 여전히 사업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리퍼트 대사는 “해외에서 한국과 미국 기업가들 모두로부터 항상 듣는 얘기가 한국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규제가 많다는 것”이라며 “한국의 규제 과잉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적했는데도 많은 것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에만 있는 규제로 자동차 좌석 크기에 대한 규제를 들었다. 데이터 관리를 위한 서버를 따로 마련하라는 나라도 한국뿐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한국의 규제는 외국인 투자자를 포함한 일반인의 의견수렴 과정이 사실상 없이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지고 같은 규제도 상황과 담당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리퍼트 대사는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한국은 TPP(가입)에 매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TPP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역, 환경, 노동 등 분야에서 여러 새로운 약속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과 한국처럼 같은 지향점을 가진 나라들이 아시아의 경제규칙을 수립하지 않으면 중국 같은 나라가 만들게 될 것인데 이는 한·미 FTA 수준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며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을 견제하는 모습도 보였다.

리퍼트 대사의 발언에 산업부는 FTA의 이행과 현안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무역 적자로 발생하는 현안은 공급 과잉 등 산업 구조 측면에서 봐야지 이행 여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더욱이 한·미 교역 중 무역은 미국이 적자를 보고 있지만 서비스 쪽은 흑자를 보고 있다는 게 산업부의 주장이다.

한·미 FTA가 국내 산업 도약의 계기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술 수출로 7조원의 ‘잭팟’을 터뜨린 한미약품의 성과가 한·미 FTA가 발효되지 않았다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당시 국내 제약회사의 반발이 컸지만 특허 제도나 의약품 허가 요건을 미국 수준으로 맞추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미약품이 나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글=박성우·김민상 기자 blast@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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