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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와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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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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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

2000년,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은 단지 폴리머, 즉 고분자 중합체였다. 정부는 중합체는 분자량이 커서 비등점이 높기 때문에 공기 노출로 인한 흡입독성에 대한 안전성평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행정적 판단을 했다. 상온에서 휘발성이 낮다는 이유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도식적 판단이었다. 가스상으로 휘발하지 않더라도 물에 잘 녹을 수 있는 중합체는 공기 중으로 분무된 물방울에 포함된다. 물이 증발하고 나면 공기 중 아주 작은 입자로 남아 떠돌아다닐 수 있다.

돈에 현혹돼 기본 원칙도 무시
정부도 독극물로 인식 못해
각자도생 참담한 현실 드러나
문제 해결 위한 공적 체계 필요

2001년, 가습기 물은 순수하고 깨끗한 물만을 사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가습기 물탱크에 세균이 번식하면 분무된 물방울에 세균이 포함돼 감염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은 세균을 없앨 수 있다며 살균제를 내놨다. 세균을 없애기 위해 물에 독성이 있는 약품을 섞어서 사용하게 한 것이다. 깨끗한 물만 사용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무시한 채 돈에 현혹돼 당장 눈앞의 효용만 강조하고 그에 따른 장기적인 부작용은 떠넘긴 근시안적 시각이었다. 설령 가습기 물탱크 살균용으로 개발했다 하더라도 살균제를 닦아내고 깨끗한 물만을 담아 가습을 하도록 했어야만 했다.

2006년, 질병은 괴질인 경우 가장 큰 사회적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떻게 옮길지 모르고 원인을 모르는 경우 그 정체를 제대로 밝히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특히 기존에 알려진 원인이 아닌 경우 사례만 조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피해 집단에 대한 역학조사를 해야 한다.

2011년, 결국 화학물질에 의한 참사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테러는 생물무기뿐만이 아니라 화학무기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화학물질을 산업적 측면으로 바라봤을 뿐 독극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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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테러의 목적은 단순한 살상이 아니라 공포의 조성에 있으며 정부는 이를 해소할 책임이 있다. 정부가 테러의 원인을 밝혀냈다고 해서 내부에 남아 있는 분노가 그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원인 규명을 무시하는 정부, 정부에 외면받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업은 물론 그 문제를 방기하는 정부에도 분노가 집중되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 온 선택,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 이 때문에 후회하고 억울해하는 피해자들의 사연….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개인이 혼자서 밝힐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었다.

2014년, 여기서 일단 건강이 손상된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구제하고 지원해야 한다면 그 기본 목적은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우선 그냥 주는 것이어야 한다. 돈을 다시 받아낼 수 있는, 즉 원인 제공자에게 확실하게 구상을 할 수 있는 피해자들만 선별해 그들에게만 도움을 준다는 것은 정부가 돈은 전혀 들이지 않고 생색낼 수 있는 일만 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습기 살균제 3, 4등급 판정자들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해 생긴 부작용을 신고한 사람들이다. 폐질환 기준에 비춰 볼 때 그 가능성이 낮다고 하지만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질환을 포함해 향후 어떠한 건강 영향의 가능성이 더 있는지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구상할 것을 생각해 지원하겠다고 한다면 구제가 아니라 먼저 배상해 줘야 하는 이유다.

2016년, 아직 우리는 법정에서 판사를 설득하려면 학식·연줄·체면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가능성이 큰 사회에 살고 있다. 특히 동원된 학술적 자료를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검증할 수 있는 기회와 방식이 매우 제한된 민사재판이라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검찰이 나서기 이전에 왜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검토가 상세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사실 규명의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또 그런 검토 근거를 마련하는 데 전문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다뤘던 우리 사회의 방식이 비틀어지고 꼬이면서 피해자가 발생하고 문제가 드러나게 된 과정을 되짚어 본 것들이다. 화학물질의 독성 관리, 기업의 영업상 비밀, 바이오 테러와 역학조사,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영향조사, 환경오염 피해의 구제, 그리고 사실규명에서의 전문 연구윤리 등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각자도생의 참담함이 드러나는 지점들이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자료의 생성, 정보의 정리, 지식의 검증, 그리고 지혜의 실천이 마련될 수 있는 공적 체계를 조금씩이나마 만들어가는 일이, 현재까지 드러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지만 만들어진 제도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인프라와 함께 법정신 내지는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가치와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안전과 보건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가치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부터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