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믿는 신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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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 2루수인 NC 박민우와 KIA 서동욱
불교·기독교 상징 땅에 그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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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KIA와 NC의 경기. NC 2루수 박민우(23)가 1루와 2루 사이 그라운드에 불교를 상징하는 ‘卍(만)’자 20여 개를 발로 새겼다. 그러자 기독교 신자인 KIA 2루수 서동욱(32)은 옆에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이를 두고 일부 팬들은 “그라운드의 종교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또다른 팬들은 “신앙 표현은 개인의 자유”라며 논쟁을 벌이고 있다.

불교 신자 박민우는 31일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랬다.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이렇게 큰 이슈가 될 지 몰랐다”고 말했다.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스포츠에 종교가 개입하는 순간 대결구도가 만들어진다.

태생적으로 스포츠는 영토 전쟁, 종교 전쟁의 대리전 성격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중미의 국경선을 두고 다퉜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을 전쟁처럼 치르며 외교 단절까지 간 사례도 있다. 최근엔 영토 분쟁이 스포츠로 번지는 일이 거의 없지만 종교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가 된다.

| 스코틀랜드 셀틱 팬 카톨릭 많아
개신교 주축 레인저스와 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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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둔 프로축구 레인저스와 셀틱의 ‘올드 펌 더비’는 종교 전쟁으로 불린다. 1872년 창단한 레인저스의 주축 팬은 개신교를 믿는 스코틀랜드 토착민이다. 반면 1887년 창단한 셀틱의 팬들은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많고, 대부분 카톨릭 신자다.

2006년 셀틱 골키퍼였던 아르투르 보루츠(36·폴란드)는 레인저스와의 경기 도중 가슴에 성호를 긋는 제스처를 했다. 카톨릭 의식을 보고 화가 난 레인저스 팬들이 난동을 일으켜 경기가 한동안 중단됐다. 셀틱 팬들은 보루츠를 ‘신성한 골키퍼(The Holy Goalie)’라며 찬양했다.

| 선수 개인의 종교 자유 인정하지만
공적 영역인 그라운드선 자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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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에서도 기도 세리머니를 두고 종교 간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불교계가 대한축구협회에 축구대표팀 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를 자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박주영(31·서울) 등 몇몇 선수들이 득점을 한 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걸 불편하게 여긴 것이다.

당시 불교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선수 개인의 종교도 존중돼야 하지만 시청하는 사람의 종교도 존중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개신교 측에선 기도 세리머니를 막는 건 개인의 신앙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국가대항전에 정치적 표현을 금지하지만 신앙의 표현을 따로 규제하진 않는다.

미국프로풋볼(NFL) 덴버 브롱코스 등에서 활약한 쿼터백 팀 티보(29·미국)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세리머니로 유명하다. 팬들은 이 동작을 ‘티보잉(tebowing)’이라고 부르며 따라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3년 티보를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스타 1위로 선정했다. 하지만 티보는 실력보다 이 기도 동작 덕분에 과도한 관심을 받았다. 2010년부터 6년간 4개팀을 전전하다 지난해 은퇴한 뒤 현재 전세계를 돌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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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NFL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후세인 압둘라(31·미국)는 터치다운 후 절을 하는 이슬람식 세리머니를 했다가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압둘라는 “엔드존(골라인 넘어 10야드 거리)은 내게 메카(이슬람 성지)와 같다”고 말했다. 축구에 비해 NFL은 종교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제재가 엄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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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종교적 이슈에 관대한 편이다. 박찬호(43·은퇴)와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활약했던 션 그린(44·은퇴)은 2001년 9월 27일 유대교의 최대 축일인 욤 키푸르(Yom Kippur·속죄일)를 맞아 24시간 동안 기도하기 위해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린이 종교적 이유로 4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스스로 멈춘 게 미국에서도 화제가 됐다.

다저스의 전설적인 투수인 샌디 쿠팩스(81·미국)도 욤 키푸르와 65년 월드시리즈 1차전이 겹치자 등판을 거부했다. 1920년대 세인트루이스 감독을 지냈던 브랜치 리키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여기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마다 친구와 선수를 감독으로 내세웠다.

체육철학자 김정효 박사(서울대 강사)는 “야구선수가 공적인 영역인 그라운드에 ‘卍자’나 십자가를 그린 행위는 의도와 상관 없이 종교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며 “스포츠와 종교는 분리돼야 한다. 프로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린·김원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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