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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핑크 코끼리는 옳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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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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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 일곱을”로 무공훈장 자랑을 시작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 그는 딸이 어렸을 때 몸집이 큰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동네를 일곱 바퀴 돌았다. 피를 토하며 늘어진 개는 가족의 밥상에 올랐다. 딸은 그런 아버지에게 열여덟 살까지 매를 맞으며 자랐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육식을 폭력으로 간주하게 된 배경은 이렇게 설명된다.

아버지는 노동으로 단련된 억센 손으로 딸의 입을 강제로 열었다. 딸의 뺨을 두 차례 때리면서 윽박지르기도 했다. 결국 힘으로 탕수육을 딸의 입에 쑤셔 넣는 데 성공했다. 소설은 그 뒤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가부장적 폭력성이 만든 정신적 상처(트라우마),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영혜의 ‘비범한’ 행동들을 남편과 아버지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 혐오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지난 21일 분홍색 코끼리 인형 옷을 입은 이가 등장했다. 그는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 선입견 없는 편견 없는 주토피아 대한민국 현재 세계 치안 1위지만 더 안전한 대한민국 남녀 함께 만들어요’라는 글귀가 써 있는 화이트 보드를 들고 있었다. 그는 거센 항의를 받았다. 코끼리 엉덩이에 꽂힌 뒷발질의 모습도 영상으로 기록됐다. ‘핑크 코끼리’의 신고로 경찰이 폭행 여부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는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의 교훈을 의미한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집단적 반목과 대립이 특정 세력의 악의적 조장이나 편견 때문이었음을 말하려 한다. 이는 ‘남성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남성이 나쁜 겁니다’라는 표현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이 말은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때·장소·상황을 고려하면 옳지 않은 말이다. 여성을 향한 폭력성의 문제를 다른 맥락으로 이끈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려 든다. 세월호 집회에 나타나 ‘사회가 병든 것이 아니라 이준석 선장과 유병언 등 일부가 나쁜 겁니다’고 외친 격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핑크 코끼리는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에 모인 여성들이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를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려는 것이었을까. 영혜의 아버지나 남편을 보면 남성들은 정말 폭력성의 문제에 둔감하다. 무지하기까지 하다. 한강은 그것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