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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위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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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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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꽤 오래전 일이다. 퇴근 시간을 살짝 넘겼을 때, 그러니까 아주 붐비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람이 없지도 않은 적당히 늦은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 운 좋게 출입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갑자기 내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불시의 공격에 너무 놀란 나머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개를 들어 공포와 불안, 그리고 ‘왜 하필 나인가’라는 의구심 섞인 눈으로 그저 그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 아저씨, 맞은편 청년 등 객차 안 다른 승객들의 시선이 나한테 꽂힌 사이 그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다음 정차 역에 내렸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서울에서 한밤중도 아닌 퇴근 무렵 대중교통을 탔다가 모르는 남자에게 맞다니. 세상에 무슨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있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치명적인 칼부림이 아니라 종아리에 멍 좀 생기는 발길질 정도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다.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늘 불운과 행운이라는 상반된 두 감정이 교차했다. 그런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나 같은 봉변을 당한 여자가 꽤 많다는 걸, 그리고 그때 난 운이 좋았다는 걸.

불행히도 최근 벌어진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20대 여성은 나와는 달랐다. 멍과 공포로만 끝난 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조현병 환자에게 목숨까지 잃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이 사건이 ‘여성 혐오 살인’이든 아니면 경찰 발표처럼 정신질환자의 무차별적인 ‘묻지마 살인’이든 사실 달라지는 건 없다. 무엇으로 규정짓든 희생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고, 이번 사건이 벌어진 문제의 남녀 공용 화장실을 다 없애거나 조현병 환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제도적 조치를 취한다 해도 약자(특히 여자)를 노리는 유사범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분노와 불안이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현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희생자를 애도하고 공감하기는커녕 졸렬한 조롱을 보내며 여성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는 남자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인터넷을 열기만 하면 온갖 삐뚤어지고 근거 없는 여성 혐오가 넘쳐나는 데 반해 젠더 감수성(이성에 대한 공감 능력)을 학습할 기회는 턱없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으로 살게 하려면 더 늦기 전에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아들이 위험하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