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타이지(太極)’와 태극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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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상징이 바뀌었다. 무궁화 대신 태극을 사용한다. 지금까지는 나라의 꽃 무궁화를 정부의 상징으로 하였고 무궁화 속에 정부 부처의 첫 글자를 넣어 소속을 표시했다. 앞으로는 부처별로 사용해오던 무궁화 상징이 태극 하나로 통일 된다.

태극을 모티브로 삼은 이유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무궁화보다 태극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태극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에서 도관(道觀)으로 불리는 도교사원에 가 본 적이 있다. 중국 고유의 민간 신앙인 도교(道敎)는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 불멸의 진리인 도(道)의 가르침을 믿는 종교이다.
도관에는 검은 도포(道袍)를 입은 도사(道士)들이 있었고 건물 곳곳에는 태극(太極 중국어로 ‘타이지’)과 8괘가 여기 저기 그려져 있었다. 만물을 음양(陰陽)으로 구분하고 우주를 태극과 8괘로 풀이한다고 들었다.

우리의 태극기를 보면 도교 사원에서 본 태극이 연상된다. 태극기가 도교사원의 ‘타이지(太極)’와 유사하여 한국을 찾아오는 유커(遊客)들도 태극기를 보고 도교 사원의 ‘타이지’를 연상할지 모른다.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의 일화가 생각난다. 한중(韓中)양국의 수교 직후 한국의 많은 고위층들이 베이징을 찾아왔다. 대사관은 관련 직원들로 하여금 그들을 안내하여 소기의 성과를 이루도록 도와준다. 언젠가 출장 온 사람들이 숙소 건물 내 작은 연못을 보고 수군거리면서 놀래는 표정이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손님을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듣긴 해도 우리 측 출장 인사를 위해 숙소 내 연못에 태극기 문양을 일부로 만들어 넣을 줄은 몰랐다고 감동한다. 무슨 일인지 하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과연 연못의 밑바닥에 태극 문양의 장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태극기를 흉내 내어 만든 것이 아니고 도교의 태극이었다.

아마도 건축 당시부터 만들어져 있었던 장식으로 보였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태극 문양이 중국의 곳곳에 늘려 있는 것을 모르는 우리 출장자들은 연못의 태극을 보고 우리나라 태극기를 바로 연상한 것 같았다.

도교는 유교 불교와 함께 중국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도교의 창시자로 노자(老子)를 이야기한다.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본명이 이이(李耳)인 노자는 이자(李子)라고 불리어야 하지만 ‘위대한(老) 선생님’의 뜻으로 이자보다 격이 높은 노자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북유남노(北儒南老)라는 말이 있다. 유교는 북중국 도교는 남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는 북쪽의 노(魯)나라 사람이지만 노자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기후가 따뜻하여 자연이 풍성한 남쪽에 살았다. 북쪽의 유교는 일신교적인 분위기인데 남쪽의 도교는 다신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자연환경과도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
경복궁이며 종묘에 가면 건물 속에 붉고 푸른 태극 문양을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삼태극이라 하여 세 갈래(巴)의 태극 문양도 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익숙해진 태극과 중국의 태극과의 관계가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태극 문양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의 고분 등에서 많이 보인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태극이 들어 온 것은 6-7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이 때 들어 온 태극이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 무속(巫俗) 등 토속신앙으로 면면히 내려 온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으로 도교(太極)사상이 억제되어 왔으나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明)나라 병사들에 의해 도교가 다시 전래되어 태극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한다.
서울 경복궁 근처에 도교 사원인 삼청전(三淸殿)과 도교 관서인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 서울 종로구의 삼청공원이며 소격동의 지명은 이러한 역사와 관련된다.
우리의 태극기의 역사는 오래지 않다. 근세 처음으로 국기를 만들 당시 고종의 어기(御旗) 도안인 태극과 8괘도를 변형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 어기의 태극은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으로 내려오던 태극이다.

고종의 어기를 변형시킨 태극기가 1882년 5월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 체결 시 나라의 상징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4개월 후 박영효를 정사(正使)로 일본에 간 수신사 일행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도교의 태극이 좌우흑백(左右黑白)인데 우리의 태극은 흰색 바탕에 상하홍청(上下紅靑)이다. 흰색은 백성, 푸른색은 신하, 붉은 색은 임금(民白 臣靑 君紅)을 나타냈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의 상징 태극 문양을 보고 중국 도교의 태극과 우리의 태극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태양의 후예’로 얼마 전에는 ‘별 그대’로 중국에서는 한류(韓流)가 절정에 이르고 있지만 수교 직후에도 ‘대장금’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주연 여배우의 사진이 중국 대륙 어디를 가도 안 붙어 있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가끔 중국 지인으로부터 중국에는 한류가 대단한데 한국에는 한풍(漢風 한류와 반대로 한국에 유행하는 중국 문화)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우리의 태극과 중국의 태극을 이야기 해주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문화는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전한다. 이제 태극은 중국 것도 우리 것도 아니다. 태극은 한중(韓中) 두 나라 국민이 공유하는 공통 문화의 일부분이다. 이번에 정부의 상징이 된 태극 문양의 경우에도 보통 태극이 아니고 진한 청색에 흰색 소용돌이를 추가하고 본래의 붉은 색은 띠 모양으로 보이게 하여 대한민국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잘 나타낸 디자인이라고 한다.
태극은 조화 화해 그리고 협치를 나타내는 요즈음의 시대정신에도 잘 맞는다. 태극이 우리 정부의 상징이 된 것은 부처 간 업무가 태극처럼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태극이 중국에서 왔다고 해도 우리가 그 유래를 보존하고 그 의미를 잘 살린다면 태극을 통한 한중 문화 교류에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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