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석유 권력, 왕실 직할 체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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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권력이 교체됐다. 왕실의 입김이 국제유가에 직접적으로 미칠 전망이다. 사우디 왕실은 7일(현지시간) 포고령을 통해 “알리 알나이미(81)가 물러나고 칼리드 알팔리(56)를 석유정책을 담당하는 에너지·광물자원부장관에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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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일이다. 살만 빈 압둘 아지즈 국왕은 지난해 석유정책 구조를 바꿨다. 기존 석유위원회 대신 경제개발위원회가 석유정책을 지휘하도록 했다. 경제개발위원회 수장에는 왕위 계승 2위 왕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31) 국방장관을 임명했다. 무함마드 왕자의 손에 병권과 경제정책 권한을 몰아 준 것이다. 이후 알나이미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새 에너지 담당장관에 알팔리
무함마드 왕자 최측근 임명
공격적 원유생산 정책 펼칠 듯

이번 개각에서 알나이미를 경질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무함마드 왕자는 정부조직 개편 방식을 선택했다. 지난달 내놓은 탈석유화 경제개혁 프로그램에 맞춰 석유부를 없애고 에너지·산업광물자원부를 만들어 석유 정책을 관할하게 했다. 알나이미의 자연스런 퇴진이다.

영국 BBC 방송은 “지난달 내놓은 탈석유화 전략에 맞춰 정부 조직을 개편하면서 평민 출신이지만 거물인 알나이미를 물러나게 했다”고 보도했다. 평민출신 카리스마형 석유장관 시대의 종언이다.

알나이미는 압둘라 타리키(1960~62년), 아메드 자키 야마니(1962~86년), 히삼 나제르(86~95년)에 이어 21년 동안 석유장관을 맡아왔다. 4명 모두 평민 출신 테크노크래트다. 사우디 석유정책은 왕족과 민간 전문가가 적절히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왕족이 욕심을 부려 석유 산업을 망치는 걸 막기 위해 석유장관 자리는 늘 테크노크래트에게 맡겼다. 이들 테크노크래트는 어떤 왕족 일가와도 가깝지 않은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힘의 균형 때문에 사우디 석유장관은 국제원유시장에서 자율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이후 사우디 왕실의 힘이 무함마드 왕자에게 집중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올해 31세인 무함마드 왕자는 사우디의 경제와 국방을 책임지고 있다. 이런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알나이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무함마드 왕자가 알나이미를 내치고 알팔리를 선택한 이유다.

알팔리는 무함마드 왕자의 최측근이다. 무함마드 왕자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가 경제개발위원회 산하로 편입된 직후 알팔리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무함마드 왕자는 알팔리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는데도 힘을 썼다. 알팔리는 무함마드 왕자가 지난달 25일 발표한 비전 2030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무함마드 왕자는 알팔리를 앞세워 사우디 석유정책을 장악할 전망이다. 이미 그는 위력을 보여줬다. 지난달 주요 산유국의 산유량 동결협상에서 그는 “이란이 참여하지 않는 동결 협상엔 반대한다”며 협상을 무산시켰다.

이런 무함마드 왕자가 국제원유 시장에서도 이란을 거세게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에너지 전문 분석회사인 플라츠는 “사우디가 산유량을 늘려 막 경제제재에서 풀린 이란이 원유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걸 막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알나이미는 지금까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감안해 석유전쟁을 이끌었다.

반면 무함마드 왕자는 시장 논리를 무시하고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다. 그럴만한 여력도 있다. 사우디는 여차하면 하루 100만~200만 배럴 원유 증산을 할 수 있다. 이미 그는 지난달 “이란이 원유 생산 동결에 응하지 않으면 즉시 증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래저래 국제원유 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셈이다.

서방 투자은행 등은 국제유가(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 기준)가 올 2분기 배럴당 38달러 선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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