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깨진 후 남은 ‘추억’ 박물관에 전시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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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서 시작해 전세계 50만명이 본 순회 프로젝트 전시가 된 ‘실연에 관한 박물관’. 제주 아라리오뮤지엄의 전시장 모습. [아라리오뮤지엄]

수저 두벌, 반찬통, 가구 미니어처, 트로피, 찐빵, 가발…. 도무지 맥락 없는 물건들이 전시품이 됐다.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 Ⅱ의 2~4층을 채운 100여점의 일상품. 모양도 용도도 제각각인데 깃든 사연이 비슷하다. 사랑의 증표였고, 그 사랑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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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비시치(左), 비스티카(右)

크로아티아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는 ‘실연에 관한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이 국내 최초로 제주에 상륙했다. 박물관의 공동설립자는 헤어진 연인이다. 크로아티아인 미술가 올링카 비스티카(47)와 드라젠 그루비시치(47)는 10년 전 관계를 끝내면서 남은 토끼 인형 한 마리를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 둘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물건을 버릴 수 없었다. 2006년 크로아티아에서 열리는 한 아트쇼에 전시 컨셉트를 제안했고, 사랑 후 남겨진 물건을 기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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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던 전시 풍경. 깨진 하트 모양의 받침대 위에 사랑의 기념품들을 전시했다. [아라리오뮤지엄]

42개의 기증품으로 출발한 전시는 지금까지 전세계 35개국을 돌았다. 각 도시에서 전시를 할 때마다 또다른 기증품을 받아 물품이 3000여개로 늘어났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 상설 박물관을 열었고, 곧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연다.

한국에 온 실연박물관

제주 전시를 위해 방한한 이들을 개막 하루 전인 4일 현장에서 만났다. 헤어진 연인에서 동업자가 된 묘한 인연이다. 둘은 “처음 전시를 시작할 때 자주 싸우며 힘들었지만,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전시가 생명체처럼 자라나기 시작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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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전시했던 벽에 박힌 도끼. [아라리오뮤지엄]

아라리오뮤지엄은 ‘실연박물관’의 한국 전시를 위해 2월 14일부터 한 달 간 사연과 물품을 기증받았다. 한국 전시가 끝나면 기증품과 전시는 크로아티아 상설박물관의 컬렉션으로 영구 소장된다.

한국 전시를 기획한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는 “자발적으로 얼마나 기증할지, 기증품과 사연이 전시를 할 만큼 가치를 띨지 걱정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런데 총 82개의 물건과 사연이 속속 도착했다.

만난지 1000일을 기념하며 연인의 이름을 새겨 만든 램프를 보낸 여자는 “‘언제나 너의 곁에 변함없이’라는 글귀가 무색할 만큼, 세 번째 가을날 우리는 남이 되었습니다. 이별은 아프지만, 사랑의 흔적이 담긴 추억까지 아프지 않도록 이 램프가 그곳에서 환하게 켜지길 바랍니다”라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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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시에 나온 코란도. 코란도는 사별한 남편이 타던 차를 아내가 보내왔다. [아라리오뮤지엄]

사별한 남편이 몰던 코란도 자동차를 보낸 아내도 있었다. 7년간 마당에 놓아두어서 타이어가 삭아버린 차. 아내는 “당신 이대로 밖에 더 오래 서 있으면 더 상하겠어요. (중략) 제주도로 그리고 크로아티아로 따뜻한 천국 같은 곳에서 편하게 기다려요”라며 남편에게 쓴 편지를 함께 보냈다.

실연은 굉장히 사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이 전세계를 돌며 공감을 얻고 자가증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상설 박물관의 1층 카페에 앉아 관람객을 종종 관찰합니다. 전시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렇게 말하죠. ‘나라면 무엇을 기증하겠다’고요. 처음 전시를 시작할 때 러브레터나 곰돌이 같은 물건을 흔하게 받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공통적인 물건이 거의 없습니다.”(드라젠 그루비시치)

나라 별 특색도 있다. 그루비시치는 “한국의 경우 보내는 사연이 길고, 이별에 더 슬픈 감정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경우 자신의 사연을 남의 이야기 하듯 타자화해서 말하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멕시코에서는 기증받기로 한 첫날 200개의 사연과 물품이 접수되기도 했다. 그는 “훗날 이런 나라별 특징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체계화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9월 25일까지 열리는 전시에서 관객들은 기증품을 앞에 두고 전자책으로 그 사연을 읽는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은 그 어떤 전시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무엇보다 슬프다. 남은 것이 떠난 것을 떠오르게 한다. 홀로 여행하며 육지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하려는 이들이 많아진 제주는 요즘 ‘실연의 섬’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두 설립자는 말한다. “살아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세상의 중심도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요. 영원한 것은 없죠. 실연도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실연박물관’은 “사랑과 유대에 대한 갈망의 전당”이라는 평과 함께 전세계 50만 명이 관람했다. 2011년 유럽 뮤지엄 포럼이 가장 혁신적인 박물관에 수여하는 ‘올해의 유럽 뮤지엄 케네스 허드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주=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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