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일본 기행] 10. 미래 향한 연구개발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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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고베(神戶) 서쪽 75km에 위치한 하리마(播磨) 과학공원도시. 1천4백36m 길이의 방사광(放射光)시설 '스프링 8(Spring 8)'이 과학단지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X선보다 1억배나 강한 빛을 만드는 첨단시설이다. 1997년 일본 정부가 1천1백억엔(약 1조1천억원)을 들여 세웠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방사광 시설이다.

기존의 진단법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던 작은 암을 찾아내고 과거 1년 걸리던 분자구조 해독을 불과 며칠 안에 끝낸다.

한해 평균 9천여명의 국내외 연구진이 찾아와 1천4백여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하라 마사히로(原雅弘)수석연구원은 "미국 에너지부의 방사광 시설에서 실험하다 실패해 이곳을 찾는 외국 연구진도 많다"고 말했다.

이 시설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 연구해 생명과학.정보기술.나노기술 등 첨단 과학기술의 씨앗을 뿌려달라는 일본 정부의 말 없는 주문이다. 이에 화답하듯 이날 둘러본 방사광 시설 근처의 연구진 책상 곳곳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지난해 일본 정부가 출범한 '단바쿠(단백질) 3000'프로젝트의 산실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1만개가량의 단백질 중 적어도 3천개는 일본이 그 구조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지놈에서는 미국 등에 뒤졌지만 잠재적 상품가치가 더 큰 단백질 분야에선 주도권을 잡겠다는 각오다.

8천개의 공장이 모인 히가시오사카(東大阪). 중소기업 단지이지만 '칫솔에서 로켓까지'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곳이다. 이곳에 '클러스터 나노테크놀로지'란 작은 회사가 있다. 47명이 일하는 허름한 회사 공장에 최근 세계 굴지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기술 임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 회사가 개발한 초미세 가공기술에 주목했다며 "그 기술을 살릴 수 있는 신소재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다. 1백나노미터(머리카락의 수백분의 1 두께) 간격으로 반도체의 기판에 금속이나 액체를 쳐넣는 초첨단 기술이다. 고성능 디지털카메라.휴대전화.생명공학 등 이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아다치 미노루(安達稔.59)사장은 수십년간 오로지 소재나 부품을 가늘게 자르는 기술만 외고집으로 연구해왔다. 그는 "지금은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곳의 상당수 중소기업은 기술 하나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 항공기 부품업체인 아오키 철공소가 있다. 이 회사의 아오키 도요히코(靑木豊彦.57)사장은 2005년 발사를 목표로 소형 인공위성을 만들고 있다. 2001년 5월 '메이드 인 히가시오사카'의 인공위성을 만들겠다고 하자 모든 이들이 그를 "황당무계한 아저씨"라고 했다.

그러나 나노테크.고성능 렌즈.무선제어기술 등 필요한 첨단 기술을 가진 동네 중소기업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이 꿈은 현실이 되고 있다. 완성된 위성을 쏘아 올릴 로켓도 우주개발사업단(NASDA)에 예약했다.

아오키 사장은 "다들 일본을 '지는 해'라고 하기에 우리의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인공위성을 만들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기술입국(立國)으로 80년대 중반 세계 제1위의 국가로까지 올라섰던 일본에선 요즘 거품 경제에 대한 반성으로 '기술로의 회귀''모노즈쿠리 국가론' 등이 한창 대두하고 있다. 오랜 방황 끝에 '살 길은 역시 기술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도쿄대 겐다 유우지(玄田有史.경제)교수는 "그동안 사라졌거나 외국에 팔린 기업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만이 가진 '온리 원(only one)'의 기술이나 특장이 없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반면 기술개발에 공을 들인 기업들은 '세계 넘버 원'의 자리를 더욱 굳혔다. 디지털카메라.DVD리코더. PDP(플라스마 화면표시장치)TV 등 '3대 디지털 가전'의 경우 일본 제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90% 이상이다.

오랫동안 액정화면 기술에 투자해온 샤프의 마치다 가쓰히코 사장은 "일본에서만 만들 수 있는 '온리 원'을 늘려간다면 아무리 불황이고, 중국의 인건비가 일본의 20분의 1이라고 해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카이(東海)대학 가라쓰 하지메(唐津一)교수는 "생산비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는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자동차 본체를 프레스 가공하기 위한 금형은 미국제의 경우 3만회 정도 사용할 수 있지만 일본제는 6만~10만회를 쓸 수 있다. 재료나 설계가 엇비슷하기 때문에 이 같은 차이는 결국 물건을 만드는 작업자의 기술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술 재입국(再立國)'을 향한 일본의 열의는 대단하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연구.개발(R&D)비의 비율이나 인구 1만명당 연구개발자의 수는 단연 세계 최고다. 특허 등록건수도 일본은 21만8천건으로 미국(19만7천건)을 제치고 세계 1위다.

문부과학성이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인력에 지원하는 과학연구비도 지난 10년 동안 두배 이상으로 늘었다. 다른 예산을 줄이더라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투자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게 일본이다. 일본의 전체 과학기술 투자는 한국의 7~8배나 된다.

일본은 2001년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5년간 24조엔을 투자해 앞으로 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을 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까지 일본이 3년 연속으로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난달 27일 이바라키(茨城)현 쓰쿠바(筑波)시 외곽에 위치한 산업기술종합연구소. 20만평 부지에 자리잡은 61개의 연구센터에서 4천4백여명의 연구인력이 미래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운영주체는 정부다.

이곳에선 지난 두달간 '2천만년 동안 1초도 틀리지 않는 원자(原子)시계'등 '세계 최고''세계 최초'의 연구성과만 6건이 나왔다.

인간처럼 움직이는 이른바 '인간형 로봇' '달리는 발전소'가 될 자동차 연료전지, 자신의 세포에서 또다른 장기를 만드는 재생의료기술 등의 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요코이 가즈토시(橫井一仁)주임연구원은 "지금 하고 있는 첨단 연구들은 앞으로 일본 미래산업의 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대 대학원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경제)교수는 "일본 경제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기초는 여전히 튼튼하다"며 "지금 '일본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나라들은 몇년이 지나지 않아 그게 오판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도쿄=오대영, 김현기 특파원

<사진 설명 전문>
1980년대 기술입국을 이끈 일본의 제조기술은 21세기를 맞아 로봇.우주산업 등 첨단분야에서 새로운 승부처를 모색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경제산업성 산하 산업기술종합연구소가 개발한 인간형 로봇을 일반에 공개하는 장면. [도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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