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성격 모호하고 앞뒤도 바뀐 한국형 양적완화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총선 뒤 잠잠하던 ‘한국형 양적완화’ 논란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6일 45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한국형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야 된다”고 밝히면서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어제 한국판 양적완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추진 의사를 내비쳤다.

 한국형 양적완화론이 내세우는 명분은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순서가 잘못됐다. 구조조정 자금은 정부가 공적자금을 조성하거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마련하는 게 우선이다. 그게 안 될 때 한국은행의 발권력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다. 특정 정책과 분야를 위해 경제 전체에 영향을 주는 통화정책을 남발하면 대외 신인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야당이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한 재정 보강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한은이 어제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 마련이 우선”이라며 난색을 표한 것도 이런 취지다.

 더구나 지금은 구조조정 청사진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이다. 조선·해운만 해도 정부의 정책 방향이 아직 확실치 않다. 현상 유지와 부문별 통폐합, 해외 매각과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어쩌면 회사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시나리오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필요한 돈이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으로 크게 달라진다. 한국형 양적완화만이 해법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부족하다. 자칫 청구서도 내밀지 않고 지갑부터 내놓으라는 얘기가 될 수 있다.

 한국판 양적완화의 성격마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총선 당시 강봉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은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산업은행의 산업금융채권과 주택금융공사의 주택저당증권(MBS)을 한국은행이 사주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업 구조조정용으로만 거론되고 있다. 방식도 한은의 국책은행 채권 인수에서 직접 출자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한은법으로도 할 수 있는 특별융자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형 양적완화 카드를 미리 제쳐둘 필요는 없지만 이 상태로 밀어붙일 일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