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살인 물질’ 제조·유통,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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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사망 239명을 포함해 1500명이 넘는다(정부 접수 기준). 사망자 대부분이 왜 고통 받는지 알지 못한 채 숨졌고, 간신히 살아난 이들은 산소통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와 가족들은 2011년 유해성 문제가 제기돼 판매가 중지된 뒤에도 제대로 사과도, 보상도 받지 못했다.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특단의 대책 마련이 시급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야당들이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와 특별법 제정을 추진키로 한 가운데 새누리당도 어제 ‘피해보상특별법’ 제정 의지를 밝혔다. 늦었지만 당연한 조치다. 시민들은 해당 업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국회 청문회를 통한 진상 규명과 정부 책임 조사, 보상만으로 사건 재발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이 본격 수사에 나서기 전까지 제조·판매사들은 발뺌만 계속했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경우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증거를 없앤 정황까지 포착돼 조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21일 홍보대행사를 통해 “50억원을 추가 출연하겠다”는 e메일 하나 보낸 게 고작이다. 얼마나 한국 소비자들을 우습게 본다는 얘긴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품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 제도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우 실제 손해액의 수배에 달하는 배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비슷한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못하게끔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미국과 영국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도급 거래와 신용 및 개인정보 이용 등에 제한적으로 도입된 상태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유해물질을 제조하거나 유통시켜 소비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한 기업에도 적용돼야 한다. 그래야 가습기 살균제 같은 독성 유해물질을 ‘인체에 무해하다’ ‘아이에게도 100% 안심’이라고 광고해 이윤을 보는 자본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다. 특히 유해 가능성을 알고도 유통시킨 때에는 더더욱 징벌적 배상으로 다스려야 소비자를 탐욕의 제물로 삼는 행태를 제대로 징치(懲治·징계해 다스림)할 수 있다. 미국에선 ‘잘못된 제품을 팔면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게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제도 남용으로 기업 경영이 위축되는 등의 부작용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영국계 다국적 기업인 옥시가 한국에서만 해당 가습기 살균제를 팔았다는 건 상징적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소비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데 취약하다는 의미 아닌가. 정부와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습기 살균제는 제2의 세월호 참사’란 시민들의 정당한 분노에 응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