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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연립정부, 전향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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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집권 보수당이 제2당으로 전락한 일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경험이다. 잡초 같은 생명력 대신 권력 해바라기 성향의 웰빙 새누리당은 집권 세력이 원내 2당으로 떨어질 때 얼마나 비참하고 모멸적인 일들이 벌어지는지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제출했을 때 국회가 부결하는 일이 다반사고 야당이 특정 국무위원을 찍어 해임안을 제출하면 바로 통과되는 상황이 낯설지 않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중대 구상이나 국무회의에서 심의된 주요 정책을 여당이 책임지고 뒷받침한다는 정부·여당의 오랜 발상법도 폐기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완전히 달라진 20대 국회, 3당 정치체제에 적응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들이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게 제1당의 힘이었지만 그런 고집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새로운 정치 환경에선 새로운 정치 행태가 생성돼야 한다. 3당 체제는 국민이 양당 체제를 그만두고 이제부터 적대 세력들이 협치(協治·협동정치) 하라고 내린 명령이다. 협치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 마당에 협치의 유력한 제도인 연정(聯政·연립정부)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연정에 대해 “국민이 만들어준 틀 안에서 협조하고 노력을 해서 국정을 이끌어 가고 책임을 져야 한다. 정책이나 생각, 가치관이 엄청 다른데 막 섞이게 되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정 전권을 온전한 형태로 위임받아 홀로 책임지라는 대통령책임제 헌법에서 뽑힌 대통령으로서 그의 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기 고유의 최종적 책임과 권한으로 야당 인사를 내각에 임명하는 건 대통령제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 정책·생각·가치관에 차이가 있어도 애국심과 토론, 타협으로 국정을 원활하게 이끌어 가는 건 정치력의 영역이다. 불가능하다고 치부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1998년 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으로 외환위기를 헤쳐 나간 귀한 경험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의 철학과 가치관은 극과 극으로 달랐지만 국난 앞에 그들의 통합적 정치력은 큰 문제없이 잘 작동했다. 지금 경기도는 새누리당 출신의 남경필 지사가 부지사 한 개와 몇몇 주요 국장 자리를 더불어민주당에 넘겨주는 연정을 무리 없이 꾸려 오고 있다. 마침 오래전부터 ‘호남 참여 연정론’을 주장해 온 박지원 의원이 국민의당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국회의장 자리를 새누리당에 양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당 정체성이 무너지는 연정은 안 된다”고 선을 그었지만 그가 국회의장을 양보한다면 새누리당은 법안이나 정책, 자리 등에서 일정한 급부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양보와 급부가 국익을 해치는 뒷거래가 아니라 투명한 협상 테이블 위에서 공동선을 목표로 추구된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다. 창조경제도 있지만 창조정치도 있는 법이다. 연정은 하기 따라서는 박 대통령과 여야 3당이 과거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공존과 협치의 정치를 펴 나가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