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기억…이야기 숲 만드는 김형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 숲 컨설팅 트리플래닛 대표
의뢰인 사연 듣고 조경 조언
12개국 120여 곳에 50만 그루

기사 이미지

트리플래닛의 김형수 대표는 “사진?영상으로 남긴 기억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숲에 담은 이야기는 수백 , 수천 년씩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향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오래전 부모님 곁을 떠나 타국에 살고 있는 딸은 양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숲’을 만들고 싶다며 ‘트리플래닛’에 연락을 해 왔다. “가족 대부분이 부산에 살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이 생각날 때마다 쉽게 들를 수 있는 장소에 자그마한 가족숲을 꾸미기로 했죠.” 트리플래닛의 김형수(29) 대표는 현재 경주 방폐장(방사성폐기물 처분장)에 조성 중인 ‘국민의 숲’을 떠올렸다. 이 숲 한편에 의뢰인의 부모님이 좋아했던 꽃과 나무를 심고, 가족들의 이름을 새긴 작은 벤치도 놓기로 했다.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트리플래닛은 숲을 기획하고 컨설팅하는 소셜벤처기업이다. 의미 있는 숲을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 적절한 부지와 나무를 추천하고, 조경회사와 협력해 숲을 조성·관리한다. 2010년 트리플래닛이라는 이름의 휴대전화 게임 앱으로 시작했다. 이용자들이 게임 내에서 몬스터를 무찌르고 아기나무 한 그루를 구출하면, 기업으로부터 받은 광고비로 실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캠페인이었다. 2012년부터는 스타 팬클럽의 기부를 받아 ‘신화 숲’ ‘소녀시대 숲’ 등을 조성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 이번 달 초 완공식을 가진 진도 팽목항 인근의 ‘세월호 기억의 숲’까지 그동안 12개국에 120여 개의 숲을 만들고, 5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기사 이미지

어릴 때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고등학교 때 ‘수목장(樹木葬)’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으면서 숲의 미덕에 눈을 뜨게 됐다. “환경 문제가 중요하다는 건 다들 알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잖아요. 나라가 알아서 해주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숲 조성에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죠.”

숲을 위한 땅은 정부나 지자체와 협약을 맺어 무상으로 제공받는다. 숲 조성 부지로 지정됐지만 예산 문제로 비워둔 땅이 전국에 의외로 많다. 나무 값은 숲을 만들고 싶은 개인이나 단체가 낸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그루당 수만원부터 수십만원까지 다양하다. “정부는 예산을 절약할 수 있고, 개인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숲을 가질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죠.” 공동체가 함께 숲을 향유할 수 있고,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도 도움이 되니 그야말로 ‘1석4조’다.

트리플래닛이 조성한 숲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긴다.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 고향집 앞뜰을 테마로 만들어졌다. 나비가 잘 찾아오는 꽃들을 골라 심고, 대청마루 같은 널찍한 평상을 놓았다. ‘세월호 기억의 숲’에는 가을이면 샛노란 ‘리본’ 잎이 매달리는 은행나무 300그루를 심었다. 황사나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들과 손을 잡고 중국과 몽골에도 숲을 조성하고 있다. “개인이나 가족,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숲을 만들어요. 기억과 치유의 효과를 가진 숲은 현재의 우리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