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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부를 도려내는 반성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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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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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반성도 있다. 지난 4·13 총선 참패를 놓고 새누리당 친박계 지도부가 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반성이 대표적이다. 이 반성의 말이 나오자마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진정성 없는 반성이 얼마나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실은 나도 남의 집안 얘기를 할 처지는 아니다. 반성의 쓰나미는 언론계에도 닥쳤기 때문이다. 총선 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여소야대의 결과 앞에 주요 매체들은 기획기사·칼럼·사설 등의 형태로 반성문을 썼다. 주로 엉터리 여론조사를 공표하고 민심을 읽지 못한 점을 반성했고, 민심의 무서움과 국민의 위대함에 찬사를 바쳤다. 현장의 목소리보다 정치인들이 생산하는 뉴스를 단순 전달하고 일부 언론은 스스로 플레이어로 뛰어들어 편파보도를 일삼은 점 등 시민들이 선거보도를 보면서 느꼈을 의구심을 꽤 조목조목 짚었다. 한데 이런 반성보도가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내고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이른 것 같지는 않다.

반성의 진정성이 의심받기 때문일 거다. 진정성 있는 반성이란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수술식’이거나 ‘미사일 요격식’이어야 한다. 잘못된 지점을 정확하게 짚고, 이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두루뭉술한 문제 제기는 반성이 아니라 반성 코스프레에 불과하다. 언론의 반성이 의심받는 건 이런 점 때문일 거다.

먼저 여론조사. 대다수 언론들은 이번 여론조사가 표본에선 모집단 성격을 반영하지 못했고, 응답률은 낮았고, 자동응답시스템(ARS) 조사로 부정확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다. 한국통계학회가 2011년에 이미 “ARS 조사는 비과학적으로 선거 여론조사에 부적합하며, 언론에 공표하면 안 된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언론은 눈을 감았다. 언론의 윤리성을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지난 주말 몇 명의 중견 언론인과 전문가가 모여 20대 총선의 여론조사와 그 보도의 문제점을 복기하는 소규모 세미나를 했다. 이날 주제발표를 했던 김춘식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언론은 선거 때면 누가 될지를 점치는 여론조사에 왜 그렇게 매달리느냐”고 물었다. 그건 여론조사가 과학적으로 민심을 재는 척도라는 착각을 믿음으로 ‘승화’시켜 민심을 반영한다는 코스프레용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여론조사를 통해 측정되는 여론(민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학설은 무시됐다.

또 언론의 중립성을 의심받게 하는 폴리널리즘(정치+저널리즘)은 선거 후에도 기승을 부린다. 한 예로 하루 종일 돌아가는 종편들의 뉴스쇼에는 부정확한 예측능력과 뭔가 의도를 가진 듯한 폴리패널(정치인+패널)과 폴리널리스트(정치인+언론인)들이 득시글댄다. 그들은 선거 전에는 여당의 과반 의석은 기정사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선거 후에는 ‘선거 참패 5적’을 운운하며 말을 바꿔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민의가 무섭다면서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국민은 위대하다”는 수사 뒤에 숨어 정치권·정권 때리기로 정치권을 심판한 국민의 비위를 맞추려는 비겁의 조짐이다. 국민은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권의 변화를 주문했다. ‘어떻게’를 제시한 건 아니다. 어떻게의 해답을 찾는 건 정치권과 정부의 몫이고, 언론은 민심을 읽어 방향을 제시하고 감시와 견제의 날을 세워야 한다. 건전한 비판이 아닌 때리기와 흔들기는 진정한 역할이 아니다.

폴리널리즘은 언론의 임무를 방해한다. 언론의 반성은 혼란을 자초했던 폴리널리즘의 환부를 도려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거다. 한국 언론은 엄청난 욕을 먹고 있지만 몇몇 미꾸라지들이 흐려놓은 물에서도 녹슬지 않는 비판정신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이런 언론인들의 의욕과 문제 제기가 투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개혁을 늦추지 않는 게 반성의 길이다. 한국 언론의 실력과 힘을 믿는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