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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박근혜 정치와 국민선거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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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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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대 총선은 한국에서 집권보수당이 최초로 두 가지 점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과반의석 붕괴와 제1당 지위의 상실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압도적인 지역이점을 갖고 있는 보수파 정당이 아닌 개혁파 정당이 정상적 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한 것은 사상 최초다. 2004년 총선에서 개혁파 정당이 제1당이 된 것은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비정상적 사태 때문이었다면, 이번은 일상시기의 선거였다는 점에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정치적 탄핵에 가까웠다.

여권 과반 붕괴·1당 지위 상실
집권보수당 최초로 동시 달성
사실상의 정치적 탄핵 가까워
식물 대통령의 위기 시기에
거대 야당 개혁능력 못 보여주면
더 잔인하게 기회 박탈당할 것

집권당은 과반에도 크게 미달하는, 민주화 이후 집권보수당의 최소의석을 기록했다. 이번 보수파 집권당의 의석은 1988년 총선 4당체제하의 민주정의당(125석)보다도 적다. 122석은 탄핵소추 시점 보수정당의 121석과 거의 같다. 즉 정상적 선거에서는 역대 최하다. 어떻게 이런 선거 결과가 발생했을까? 요체는 박근혜 대통령 정부의 업적과 정치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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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무능이다. 2016년 우리 삶의 주요 지표들은 통계조사 이래 ‘역대’ 최악·최저다. 2015년 가계부채 규모는 역대 최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도 역대 최대다. 가계부채 증가율도 역대 최고다. 올해 1월 결혼건수는 역대 최저다. 출산건수도 같다. 2월의 청년실업률도 역대 최고다.

둘째 일관된 남 탓이다. 즉 책임윤리의 부재다.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헌법이 부여한 최종 책임을 회피해 왔다. 초기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논란부터 심각한 가계경제 및 국가경제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중심 접근방식은 책임회피와 국회 탓, 야당 탓이었다. 반면 국민들은 국가현실이 대통령 탓, 정부여당 탓이라고 응징투표를 한 것이었다.

셋째 과도한 의회개입이었다. 청와대의 국회에 대한 과도한 개입은 사실상 3권분립 파괴로서 헌법위반 행위였다. 심지어 의원총회에서 선출된 원내대표가 강제 축출되는 독재시대 현상도 민주화 이후 처음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의회는 마비, 입법교착, 정쟁을 반복해야 했다. 국회가 정쟁이 극심했던 이유는 헌법이 보장한 자율성의 부재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야권의 호남 이탈과 수도권 분열이라는 조건에서 선거를 치렀다. 선거구도에 관한 한 과반을 넘어 개헌선조차 의욕을 가질 정도였다. 그런 조건에서 최악의 패배를 노정, 역설적으로 대통령 실정과 야당 분열이 만나면서 고질적인 지역주의의 현저한 완화를 결과했다. 대통령은 부친 시절에 생긴 호남배제라는 부도덕한 정치적 지역주의를, 자신의 실정을 통해 영남 민주세력을 부활시켜 줌으로 인해 상당히 해소한 셈이었다.

특별히 수도권 압승과 영남 개혁세력의 폭넓은 복원을 통해 호남 밖의 개혁파 정당이 호남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제1당이 되었다는 점은 향후 지역주의 및 민주주의 향방과 관련해 중대한 시사를 던진다. 호남의 도덕적 우월감과 선택권은 이제 호남 밖의 개혁세력과 현실적 길항관계에 접어들 것이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고리로 강하게 연대해 온 호남 밖의 민주개혁 세력을 당내 경쟁 과정에서 패권세력이라고 공격하며 결별하는 대신 중도세력과 연대해 호남정치를 복원한 것은 민주파 정치연합의 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호남 밖의 민주파가 호남세력의 지지 없이 외려 그들과 갈등하면서도 제1당이 되는 확장성을 보여줌으로써 87년 DJ-YS 단일화 논란 이래 계속돼 온 개혁성·진보성과 확장성·당선가능성의 대립축은 혼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7현(賢)의 한 사람인 비아스는 “지배자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 인품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지도자를 배신하면 그 사람이 배신자이지만, 여럿이 계속 그를 배신하면 지도자가 배신자가 된다. 대통령은 자신의 사람들 여럿이 재임 중 곁을 떠나거나 야당으로 건너가 자신과 맞서는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배신의 정치로 응징당한 그들이 국민에 의해 재기하는 역(逆)응징 과정이었다.

더 큰 배반은 다가올 자기부정이다. 국회선진화법과 일 안 하는 국회를 탓한 정부와 대통령으로서 과반을 넘긴 거대 야당들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조사, 세월호 사태 진상규명, 국사교과서 국정화 중단과 검정 환원, 테러방지법 개정을 추진하면 그때는 여당이 필리버스터를 하거나, 야당에 국회선진화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인가? 설득과 타협이 필수였던 까닭이다,

현행 헌법은 임기 후반의 대통령을 식물대통령으로 만든다. 임기 전반 제왕적 대통령 시기에도 못 쌓은 업적을 식물대통령 시기에, 특히 거대 야당을 상대로 달성한다는 것은 난망하다. 따라서 대통령의 위기는 야당엔 기회다. 그러나 거대 야당들이 보수파 정당과는 다른 개혁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2004년 총선과 2007년 대선의 반대조합에서 보듯 국민들은 그들에게 주었던 기회를 더 잔인하게 박탈할지 모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