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케리의 히로시마 방문, 일제 면죄부 돼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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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어제 원자폭탄 피해의 상징인 일본 히로시마(廣島) 평화공원에 간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케리 장관은 미 국무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해 1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피폭의 참상을 절감케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주도로 추진 중인 비핵화 운동이 본격화된 상황이어서 이번 방문은 더욱 뜻깊게 보인다.

그럼에도 일제 침략에 신음했던 한국으로서는 우려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 방문이 일제의 과오를 희석시켜 일본이 가해자 아닌 피해국이라는 그릇된 메시지를 줄까 두렵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일본 민간인이 희생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중국 등 주변국을 침략해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고통을 준 사실까지 용서되거나 잊혀져서는 안 된다.

오바마 대통령도 다음달 일본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히로시마를 찾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임기 초부터 ‘핵 없는 세상’을 줄기차게 추진해 온 그로서는 역사적인 이곳에서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전체의 눈으로 볼 때 지금 미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가는 것은 시기상조다. 우선 일본은 한국·중국 등 피해국들로부터 온전히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피해국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옛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정권은 일본군 위안부 및 난징 대학살 등과 같은 민감한 과거사를 그대로 인정하기는커녕 뒤틀어 보려 한다. 특히 지난해 말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끌어냈지만 일본 측의 성실한 이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아베 총리의 복심이라는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장관은 최근 “위안부 지원재단 설립과 소녀상 이전은 패키지”라며 합의되지 않은 내용까지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의 하나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이 성사돼도 이것이 일제 만행에 대해 면죄부가 아님을 미국은 확실히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