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⑩ 우롱차의 고향, 아리산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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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빙 둘러싼 다실이 멋스러운, 타이중 우웨이차오탕.

‘좋은 차(茶)를 사는 것은 그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같이 사는 것이다.’

타이베이의 쯔텅루, 지우펀의 지우펀차팡, 타이중의 우웨이차오탕 등 타이완의 오래된 찻집을 순례하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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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고산지대에 펼쳐지는 푸른 차밭.

평소 집중장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산만한 나도, 차를 마시는 동안은 차분해지곤 했다. 향을 맡기 위해 고안한 길쭉한 찻잔 원샹베이(聞香杯)에 코를 대면 오로지 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찻잔을 비울수록 마음도 촉촉해졌다. 다도가 몸에 익을 무렵엔 여린 찻잎은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졌다.

타이완의 차나무는 중국 푸젠성(福建省)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 시초다. 타이완은 중국에 비해 차 역사가 짧은데도 천혜의 자연환경 덕에 세계적인 우롱차 산지로 자리매김했다. 국토의 3분의 2가 구릉과 산이며 연평균 기온이 높아 12~2월을 제하면 늘 찻잎을 수확할 수 있다. 차는 발효 정도와 제다(製茶) 방법에 따라 녹차(綠茶), 백차(白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홍차(紅茶), 흑차(黑茶)로 나뉘는데, 타이완의 특산물 우롱차는 청차에 속한다.

철 같은 묵직함과 관세음보살 같은 부드러움을 지녔다는 티에관인(鐵觀音)은 타이베이 근교 마오콩, 치자 꽃처럼 달콤한 ‘청향(淸香)’을 풍기는 동딩우롱차는 난터우현 동딩산이 산지다.

천년의 신비를 품은 아리산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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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단맛이 그윽한 아리산 우롱차의 고향은 ‘아리산(阿里山)’이다. 아리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다. 타이완의 최고봉 옥산을 중심으로 한 18개의 봉우리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그중에서도 해발 1200~1600m 사이 계단식 차밭에서 재배한 찻잎으로 만든 차를 ‘아리산 고산 우롱차’라 부른다.

동화의 숲을 오가는 아리산 산림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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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에는 우롱차만큼 유명한 산림철도도 있다. 1000년이 넘은 울울창창한 고목들 사이로 백 년이 넘은 열차가 오간다. 일제강점기에 목재 운반용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인도의 다즐링 히말라야 철도, 페루의 안데스 철도와 어깨를 겨누는 세계 3대 고산열차다. 해발 2216m의 아리산역에서 출발해, 해발 2138m 신목행과 2274m 주산행 두 종류. 단, 타이완 어디서 출발하든 중부의 소도시 ‘자이’까지 가서 버스로 2시간 30분을 가야 아리산에 도착한다.

자이에서 출발한 버스는 덜컹거리며 굽이굽이 아리산을 올랐다. 차창 밖으로 변화무쌍한 풍경이 펼쳐졌다. 열대·온대·한대 등 서로 다른 삼림대가 눈앞을 스쳤다. 어느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초록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차밭이 지천이었다. 언젠가 아리산에서 우롱차를 사와야지 했던 바람이 곧 이뤄질 것 같았다.

마침내 아리안 기차역에 도착하자 플랫폼엔 자오핑행 빨간 디젤 기관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에 몸을 실으니 차창 밖으로 늠름한 삼나무의 행렬이 지나갔다. 자오핑 역에서 내려 신목 역까지 트레킹을 했다. 산을 오른다기보다 숲으로 스며드는 듯 완만한 코스라 부담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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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우롱차는 원샹베이로 향을 맡은 후, 차베이(찻잔)으로 차를 마신다.

노송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한 숲길은 사이로 떨어지는 한 가닥 빛줄기마저 그윽했다. 숲이 깊어질수록 신비로운 풍경의 연속이었다. 두 그루의 사이프러스가 만든 하트 나무, 3대에 걸친 노송이 한데 얽혀 자란 삼대목 등 1000년 이상 된 거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렇게 명장면 같은 대자연에 흠뻑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리산에서 자이로 돌아가는 버스 안, 차밭 사이를 걸어보지도 못하고 하산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입을 삐죽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췄다. 얼떨결에 차에서 내리니, 작은 찻집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아저씨들의 뒤를 따랐다. 담배를 물고 차를 고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껴서 시음을 했다. 차 맛이 좋을 땐 ‘하오허(好喝·음료수가 맛있다는 뜻의 중국어)’라며 추임새도 잊지 않았다.

막상 차를 사려니 짧은 중국어 탓에, 영어가 툭 튀어나왔다. 한국인이라고 커밍아웃 한 순간 시선이 집중됐다. 목소리가 커진 주인장과 동공이 확대된 아저씨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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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 찻주전자를 담아 내주는 타이완 전통 다구.

주머니 사정과 차 맛을 저울질 하다 상급의 아리산 우롱차를 택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음에 드는 차 한 통 샀을 뿐인데, 박수갈채라니! 엄지까지 척 치켜드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 집에 돌아가도, 차 마시는 시간이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를 사는 것은 그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같이 사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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