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30억 들여 노벨상급 6명 모셔왔지만 정규 강의 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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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들을 모셔온다며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게 사실입니다. 1년 중 한국에 머무는 기간은 두 달 남짓에 불과하고, 강의조차 맡지 않아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조차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노벨경제학상 사전트, 15억에 초빙
특강 250명 정원에 21명 수강신청
1년 뒤 귀국…"세미나 참석 등 부담"

국내 체류 두 달 남짓 ? 사실상 방치
서울대 측 "강의 안 해도 공동연구"

서울대가 2012년부터 시행 중인 ‘노벨상급 석학 초빙 사업’에 대해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의 한 교수는 3일 이렇게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만 빌려올 뿐 연구 여건 조성 등 세밀하고 장기적인 계획이 부족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대외홍보용 사업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의미다. 일부 교수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노벨상 수상자들을 초빙해 놓고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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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대에 재직 중인 노벨상급 석학은 200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아론 치에하노베르 의학과 석좌교수 등 총 6명이다. 이 중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이란 평가를 받는 2008년 호암상 수상자 김필립 물리·천문학부 석좌교수도 포함돼 있다. 나노소재 그래핀 연구분야 권위자인 김필립 교수는 2013년 3월 서울대에 초빙됐지만 그간 정규 수업 없이 한 학기에 한 차례씩 특강만 진행했다. 올해 김 교수의 연구·수업 계획과 관련해 서울대 관계자는 3일 “이번 학기 역시 정규 수업을 맡지 않았다”고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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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석학들도 비슷하다. 서울대가 현재 6명의 석학들에게 지급하는 연구지원비와 기타 운영비(국내체재비와 항공료 등) 등은 연간 30억원 수준이다. 그러나 2016년도 1학기 기준 정규 강의를 맡은 교수는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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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의 석학 초빙 사업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서울대가 법인화 이후 처음으로 초빙한 석학은 토머스 사전트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다. 그는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서울대는 2012년 9월 연구지원비 8억원에 기타 운영비 2억원 등 매년 15억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사전트 교수를 데려왔다. 그러나 파격적 조건에도 사전트 교수는 애초 2년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한다는 계약을 깨고 1년 만에 서울대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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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사전트 교수의 능력과 명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제기된 배경이다. 서울대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사전트 교수의 ‘거시경제학 특수연구’ 수업엔 50명 정원에 14명만 수강신청해 신청률이 28%에 그쳤고, ‘거시경제학 특강’은 250명 정원에 단 21명만이 수강신청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김모(27)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노벨상을 수상한 석학이 굳이 학부 2~3학년 수준에서 듣는 거시경제학 특강을 왜 맡았는지 모르겠다”며 “교내에서조차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았고, 영어 수업이라는 점 때문에 수강을 포기한 학생도 많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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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서울대 측은 “강의는 하지 않더라도 세미나와 공동연구는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초빙 석학들이 국내에 체류하는 기간은 짧으면 1년에 6주, 길어도 2~3개월에 그치는 수준이다. 이마저 외부 특강과 일정이 빼곡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함께 석학뿐 아니라 대학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인원을 늘려 온 외국인 교수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지원책 마련도 시급하다. 외국인 교수들은 집을 구하는 문제부터 시작해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일본처럼 외국인 교수의 현지 적응을 돕는 코디네이터·멘토링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열·순혈주의가 강한 한국 대학 문화도 적응을 방해하는 요소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한 외국인 교수가 ‘생활여건 지원은커녕 연구시설 이용이나 학교생활 등에 대한 기본적 지원 시스템조차 없다며 불평을 쏟아내더라”고 말했다.

정진우·윤정민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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