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서 관청 추정 건물터 첫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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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유적지에 3m 깊이로 판 발굴 구덩이. 고대 신라인의 왕실문화가 드러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문물은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 슬프다. 산과 물은 옛날과 지금이 같구나.”

정사각형 부지에 14개 건물 배치
‘흙 벼루’ 조각도 50여 점 나와

신라 멸망 때까지 도성으로 쓰여
“화려했던 문화 밝힐 실마리 기대”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읊은 시다. 신라 왕궁터였던 월성(月城·사적 16호)에 대한 애달픈 심정을 노래했다. 모양이 반달을 담아서 월성이라 했다. 30일 찾은 경주 월성. 1000여 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월성의 속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정밀 발굴에 들어간 월성 유적지에 대한 현장 설명회가 이날 열렸다.

경주 첨성대 남쪽에 있는 월성은 총 20만㎡ 규모다. 석빙고와 맞붙어 있는 C지구(5만㎡)를 먼저 둘러보았다.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된 발굴지 한 켠을 깊게 파고 내려간 구덩이(트렌치)가 보인다. 삼국시대를 거쳐 근대까지 쌓인 시간의 지층이 드러났다. 이번 발굴은 그 중 통일신라 시기를 집중 조사한다.

본격 발굴이 시작된 지 2년째,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지만 통일신라 후기(8세기 중반 이후) 건물지군이 처음 확인됐다. 동서 51m, 남북 50.7m 크기의 정사각형 부지에 총 14기의 건물이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곳에서는 흙으로 만든 벼루 조각 50여 점이 출토됐다. 지금까지 경주 일대에서 나온 벼루 조각 중 가장 많은 양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종훈 연구관은 “왕실 행정문서를 작성하는 사무공간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건물의 정확한 용도를 알려면 보다 명확한 문헌조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라의 건축양식도 새로 찾아냈다. 크고 작은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진 다음, 같은 방식을 세 차례 반복하며 건물터를 닦았다. 기초를 단단하게 하려는 목적에서다. 현재 발굴은 C지구 외에도 월성 서쪽 A지구, 성밖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만든 못) 세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형태의 기와·토기 등도 다량 출토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월성은 신라 5대 파사왕 22년(서기 101년)에 완성됐다.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도성(都城) 역할을 했다. 수도를 몇 차례 옮긴 고구려·백제와 달리 월성은 신라의 흥망과 함께했다. 고려시대 이후 지금까지 거의 방치돼오다 2년 전 문화재청과 경주시 주도로 발굴사업이 시작됐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정비하는 차원에서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에도 포함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심영섭 소장은 “당초 10년 계획으로 시작됐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다”며 “과거 화려했던 신라의 문화를 밝혀내는 또 다른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주=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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