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지창간 20돌 특별기획 한일국교 정상화 20년 맞아 다시 찾아본「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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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마도의 2월은 섭씨10도가 넘는 포근한 날씨였다. 새벽부터 후줄근히 퍼붓는 빗속의 남부 이즈하라(엄원)항을 떠나 택시를 타고 일로 배진, 대마도 북단의 사스나(좌수나)항에 닿은 것은 10일하오 3시쯤.
『저기 보인다.』
취재팀과 동행한 재일사학자 이진희교수(명치대강사)가 갑자기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언제 궂었더냐는 듯 청량하게 갠 북단의 수평선 저 위로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낸 육지. 대한민국의 연봉들이다.
영도일까. 영도의 태종대 같다. 그 옆으론 가덕도일지도 모른다.

<한번에 5백명씩>
벌써 다섯번째나 이곳을 찾는다는 이교수는 아침 일찍이면 몰라도 오후에 이렇게 한국땅을 보기는 처음이라며 거푸 감격한다. 올때마다 새로운「해석」을 던져준다는 대마도 북단.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몸을 날릴만큼 드세다. 그 바람을 피해 긴 산자락 속에 고즈너기 감싸여 있는 소항 사스나.
사스나항에 지금 활기는 없다. 홋수 4백여호. 한국과는 50㎞ 밖에 안떨어진 가장 가까운 국경의 마을.
그러나 이 항구는 부산포를 떠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첫발을 딛는 최초의 기항지였다.
이교수는 말한다.
『조선통신사가 왕래하게 된 것은 「도요또미·히데요시」(풍신수길)의 조선침략(임신왜란)을 깊이 반성한 일본의 실권자 「도꾸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가 대마 반주 종씨를 내세워 국교회복을 갈망한데서 시작됐지요.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쇼오군(장군)이 바뀔때마다 가곤 했는데 「도꾸가와」(덕천)막부 2백60년간 조선에서 보낸 통신사는 12번 있었읍니다.

<한국과 50㎞거리>
매번 5백명 가까운 사절단이 대마 반주의 안내로 그 수도에도(강호·지금의 동경)까지 왕래했어요. 그 접대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도꾸가와」막부는 쇼오군 일대의 성의로 중시, 오늘날엔 상상할 수도 없는 환영진을 이뤘읍니다.
통신사가 머무는 곳에선 각 반에서 문안이나 의사·승려들이 몰려들어 교류의 꽃을 피웠지요. 이런 조선과 일본의 선린관계는 일본 쇄국정책에 관계없이 명치시대가 막을 열때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취재진은 여기서 우리의 취재길에 1719년(숙종45년) 9번째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다녀온 신유한공을 모시기로 했다. 신공은 일본에 갔다온 후 『해유록』이란 불후의 일본기행록을 남긴 인물이다.
18세기초 사스나에 첫발을 디딘 신공의 감회는 어땠을까. 『어스름해질 때 홀연히 산그늘 몇 개가 돛대 사이로 떠오른다. 왜인이 가리키면서 「사스나다」하고 소리친다. 다시 더 나아가 가까워 지니- 일종의 삽상한 기운이 밀려든다.
배는 산이 트인 곳을 따라 들어가고 있다. 돌아다보니 여러 봉우리들은 겹겹이 둘러서서 마치 구슬을 꿰놓은 듯.
하늘은 망망한 물위에 비키고 수면은 맑디맑다. 일대 운하가 사방의 산과 더불어 오르락내리락 하며 북소리·피리소리가 떠들썩하고 별과 은하수가 춤을 춘다. 각 배마다 너댓개의 장대를 세워 커다란 등불을 매달아 초승달 대신 바다를 밝힌다.
포구에서 왜의 무리들이 배를 잡아타고 마중나오는 것이 수십척이다. 각각 쌍등을 휘황찬란하게 밝혀 멀거니 가깝거니 한 것이 눈부시고 기괴하다. 이상한 소리로 재잘대는 것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모두 급하게 부르짖는 것이, 마치 불을 밟은 것같다. 오랑캐들의 성질은 가볍고 사나와서 무슨 일을 만나면 번번이 놀라고 떠들어댄다』
신공은 이어 『좌수나(사스나)는 일명 사사포라고도 하며 대마도의 서북쪽 끝에 있다. 산봉우리들이 큰 가락지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백길이나 됨직하다』면서 『갯가를 끼고있는 민가는 서른채 남짓한데 모두 띠풀로 높다랗게 지붕을 이었고 그 꼭대기는 마치 분(분)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적고있다.
『사나이들은 머리를 밀고 갓은 쓰지 않으며 옷들은 소매가 넓고 바지는 없으며 칼을 차고 꿇어 앉는다. 계집들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띠를 매며 배젓는데 익숙하다』

<요새로 변한 대마>
세월은 흘러 사스나항의 사람들에겐 이런 때도 있었다.
8·15해방 전 영화가 최고의 오락이었던 시절, 어부들은 잡은 고기를 배에 가득 싣고 일본 본토보다 가까운 부산으로 향했다. 댓시간의 향해 끝에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고기를 날아 생활용품도 사고 그리던 영화구경도 했다. 달빛속에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구경은 한동안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당시 부산의 개봉일과 맞먹는 본토 후꾸오까(복강)에서 그 영화가 사스나까지 오려면 족히 두세달은 걸렸기 때문이다.
이제 산봉우리들은 의구하되 항구나 인심은 옛과 같지 않다.
매립된 항구에서 옛 자취는 찾기 어렵고 사람들 또한 역사의 인연을 캐기보다는 오늘을 살기에 바쁘다.
초로의 한 어부는 고기잡기가 계속 어려워지고 있다고 푸념한다. 바다 밑바닥까지 쓸어가는 대어선의 극성 때문에 조업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관광개발에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이 보이는 마을」이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관광객 유치에 점차 열을 올리고 있다.
통신사의 길은 사스나에 이어 대마도북단으로 계속된다.
임란당시 풍신수길의 병참기지였던 오오우라 (대포)를 거쳐 와니우라(악포)에 이르는 동안 취재팀은 여기가 더 이상 「선린」을 싣고 잤던 통신사의 길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청일전쟁 이후 대마는 섬 전체가 요새로서 명치정부에 장악됐으며 특히 북단의 이 일대는 가장 중요시돼 낯선자의 접근이 금지됐다.

<범 이빨 같은 암초>
이교수는 『와니우라 근방엔 일찌기 세계 최대의 요새포가 장치된 적이 있었다』면서 『이승만라인(평화선) 문제로 시끄러울 땐 이 지역 감시초소의 초대형 망원경이 부산항에서 출동하는 경비정의 방향을 탐지, 그 해역 일대의 일본 어선에 경보를 내리기도 했다』고 더듬는다.
지금 이곳은 항공·해상자위대의 레이다 기지와 통신시설, 헬리포트와 해상 감시초소, 높이 4백50m 위에서 전파를 관리하는 오메가 탑과 로람탑 등이 밀립돼 있어 차라리 으시시한 분위기다.
와니우라 앞을 지나며 신유한공은 이렇게 적고 있다.
『바다 가운데 큰 돌이 줄지어 있다.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렸는데 마치 고래의 어금니, 범의 이빨과 같다. 그 돌들이 풍파와 더불어 싸우는데 성난 파도가 두드리고 뿜어올리는 것이 마치 설산과도 같다.
배가 그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힘을 잃어 부서지고 번번이 뒤집히기 때문에 악포(악포)라 이름붙은 것이다. 계미사행(1643년 5차통신사)때 역관 한천석이 이곳에 이르러 익사했다.생각만해도 송연해진다』
이 격랑의 뱃길 사이로 우뚝 솟은 항공자위대의 거대한 레이다 시설을 목도하면서 이제 따뜻했던「환대」의 이길은 삼엄한 「감시」의 길목으로 바꿔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 이근성 기자 사진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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