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진보패권, 김종인을 토사구팽시키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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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종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직 사퇴 문제가 총선 정국의 돌발 변수로 떠올랐다. 이슈의 등장은 돌발적이지만 뿌리는 깊고 넓다. 그가 물러나면 이번 선거의 시대정신인 낡은 진보패권의 청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김종인 문제는 그가 내놓은 비례대표 명부안을 친노·친문재인, 운동권 집단이 지배하는 500여 명의 중앙위원회가 비토함으로써 불거졌다. 김 대표가 스스로 비례대표 순위 2번에 오르고 당헌·당규상 위반소지가 있는 이른바 칸막이 공천 이 비토의 명분이 됐다. 더민주의 지원 세력인 민변의 이재화 사법위원장이 SNS에 올린 “김종인의 노욕이 총선을 말아먹는구나”라는 공격, 문재인 세력의 중심부인 조국 서울대 교수의 “권력행사를 자제할 분이 아니다”는 인격적 모독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중앙위는 집단적 투표의 힘으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중앙위는 김 대표가 원했던 2번 자리는 인정했지만 대신 후순위에 있던 친문·운동권 출신들을 앞쪽으로 대거 이동시켰다. 친노·친문 주류가 잠시 고개를 숙였을 뿐 때가 되면 언제든 다시 일어나 집단 패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한 셈이다. 김 대표는 어제 “욕심 많은 늙은이로 나를 욕보인 건 용납할 수 없다”며 대표직을 관두려 했다. 지방에서 급거 상경한 문재인 전 대표는 김 대표를 만나 “어려운 시기에 비대위를 맡아 당을 살리시지 않았나. 총선 승리를 위해 끝까지 마무리해 달라”고 간청했다. 비대위는 김 대표에게 “잘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이번 김종인 파동에서 분명해진 건 김 대표의 정치실험이 진보패권 세력에 의해 순식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점이다. 김종인은 역시 필마단기였고 친노·친문 주류의 총선 승리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 대표가 그동안 지역구 공천에서 운동권 인사들을 쳐낼 수 있었던 것도 패권 세력이 선거 승리를 위해 잠시 양보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의 힘은 강하고 건재하다. 친노패권 문화는 자기들만의 정의를 독점하는 독선, 이념 과잉의 비현실적인 정책 노선, 세상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는 진영 논리, 상식의 세계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극단적 언행을 보여 왔다. 지난 4년간 19대 국회를 망치고 나라의 전진을 가로막은 주범으로 인식됐다. 이 때문에 야권은 2개의 정당으로 분열됐고 문 전 대표는 스스로 물러났으며 실용적 전략가인 김 대표를 삼고초려를 하면서까지 모셔 올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를 스카우트한 것도 문 전 대표지만 김 대표를 몰아붙인 ‘문재인 집단’을 무장해제시킨 것도 문 전 대표다. 결국 문재인은 김종인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줬다.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사태는 어떻게 봉합돼 넘어갈지 모른다. 하지만 총선 직후 문재인 세력은 문 전 대표의 개인 의지와 관계없이 김종인을 토사구팽(兎死狗烹)할 가능성이 있다. 그게 지난 시절 진보패권 세력이 반복했던 행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