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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정책, 제2의 ‘K-도스’ 될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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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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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용
경제부문 기자

1990년 당시 과학기술처는 MS도스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형 운영체제(OS) ‘K-도스’ 개발에 뛰어들었다. 60억원 이상을 투자해 1993년 K-도스가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MS도스와 호환이 안 되는데다, 곧 PC시장이 도스에서 윈도 운영체제로 바뀌면서 K-도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14년에는 정치권의 '팔비틀기'로 글로벌B2B(기업간 거래) 콘텐츠 유통을 돕는 ‘K-콘텐트 뱅크’ 개발이 시작됐다. 나름 기대를 모았지만사이트는 현재 방문자가 적어 한산하다.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늘 그랬듯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AI 응용·산업화 추진단’을 설립하고, 내년 예산도 크게 늘렸다. 정부의 다음 수는 뻔하다. ‘K-알파고’를 만들고, AI를 전략산업으로 키우겠다며 대대적인 브리핑을 열 것이다.  유권자 관심끌기에 목을 매는 정치권은 이에 동조해 AI에 밥숟가락을 얹을 것이다.

수가 보여서인지 IT업계의 반응도 싸늘하다. 그간의 전례를 봤을 때 단기 성과 내기에 급급할 수 있고, 기업들을 동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세상은 확 바뀌었는데 정부 마인드는 개발연대식 관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정부는 나노·문화·바이오·정보·환경 등 이른바 ‘5T 기술’을 키우겠다며 법석을 떨었지만 지금까지 성과는 모두 민간에서 나왔다. AI에서도 비슷하다. 미국에서 AI를 주도하고 있는 곳은 구글·IBM·애플 같은 민간 기업이지 정부가 아니다. 정부의 어설픈 간섭과 규제가 제2의 ‘K-도스’ ‘K-콘텐트 뱅크’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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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관전 중인 런던의 구글 딥마인드 본사 직원들. [사진 무스타파 슐레이만]

데미스 허사비스 딥마인드 창업자는 “구글이 인수한 이후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변변한 성과가 없었지만 딥마인드의 가능성에 투자한 구글의 경영철학은 ‘자율’과 ‘개방’이다. 감시·통제가 없어도 인재들은 자신의 업무를 100% 수행하고, 창의성·주인의식을 발휘한다. 믿고 맡기는 이런 문화가 구글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AI는 클라우드컴퓨팅·빅데이터 없이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데이터 해외 반출 금지, 사소한 개인정보 이용에 대한 사전 동의 등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지는 규제가 존재한다. 만약 한국에 딥마인드가 나타났을 때 구글처럼 수천억원을 지불할 대기업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AI는 생태계 조성, 전문인력 육성과 함께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 분야다. 구글만 해도 14년간 약 33조원을 쏟아부었다. 지금과 같은 ‘즉흥행정’은 AI 발전의 결정적인 ‘패착’이 될 수 있다. 정부는 구글이 그랬듯 기업이 자발적으로 혁신 사업에 투자할 분위기를 만들고, 불필요한 규제를 확 풀어야 한다. 그게 묘수다.

손해용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