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육아 전쟁, 시월드… 20대 철부지의 하드보일드 소꿉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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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테스트기에 드러난 두 줄이 한 여대생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다큐멘터리 ‘소꿉놀이’(2월 25일 개봉)는 스물세 살에 혼전 임신한 김수빈(29) 감독이 결혼과 출산, 육아, 시집살이를 잇따라 겪는 과정을 6년 동안 리얼리티 프로그램처럼 밀착해 촬영한 영화다. 엄마·아내·며느리 등의 역할 속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여성의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내, 지난해 정동진독립영화제 등 국내 여러 작은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외동딸 하노아(5)와 동행한 김 감독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꿉놀이’ 속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역할을 들여다봤다.

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제작기

2010년 여름은 그에게 무척이나 가혹했다. 덜컥 아이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남자친구 하강웅(32)과 함께하며 벌어진 일이었지만, 교수 부모님 밑에서 외동딸로 자란 김 감독으로서는 “가문에 먹칠을 한” 사건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상을 전공하며 뮤지컬 작가를 꿈꾸던 스물세 살 여대생의 당찬 꿈이 산산이 무너지는 듯한 순간이었다.


여대생, 엄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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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사진=영화사 제공]

김 감독이 카메라를 든 건 세 번째 임신 테스트를 할 때였다. 그와 남자친구가 출산 여부를 고민하는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그때다. “딱히 이 사건을 작품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내 인생은 끝났어’라 여겼던 1인칭 입장과,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 하는 관객으로서의 3인칭 입장이 제 마음속에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순간, 무작정 카메라로 내 상황을 담아야겠다 생각했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뒤, 김 감독은 결혼을 준비하며 몸의 변화를 꾸준히 촬영했다.

임산부로서의 고충은 컸지만, 딸 노아가 태어난 2011년 이후 겪은 고난에 비하면 약과였다. 엄마 역할은 물론 학업과 돈 버는 일(뮤지컬 번역)까지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20대 철부지 여대생이던 그가 산더미 같은 가사와 육아를 감당하며 엄마 역할을 익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는다.

솔직히 말해 모성애가 샘솟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아이가 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죠. 가장 두려웠던 건, 늘 내가 중심이었던 세계에서 내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위기감이었어요.”

당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카메라로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다큐 촬영은 김 감독에게 ‘오늘도 ‘창작자’로 살아남았다’는 자기 위안이자 일종의 생존 일지였다.


한국에서 아내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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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사진=영화사 제공]

임신과 육아 과정을 담으려던 영화는 김 감독의 남편 강웅의 돌발 선언으로 한층 더 드라마틱해졌다. 뮤지컬 배우였던 그가 배우를 그만두고 일본에 요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

스시 장인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남편과 그의 결정을 지지하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김 감독은 육아뿐 아니라 딸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할까지 떠안는다. 한국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신의 미래보다 신랑의 꿈을 앞세워야 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 컸다.

그러나 김 감독은 자신이 처해 있는 난감한 상황을 여성의 문제로 확대하거나 무겁게 다루는 대신, 유머러스한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을 곁들여 경쾌하게 풀어간다. 그가 직접 지어 부른, 출산 후 여성의 음부가 겪는 고충을 적나라하게 토로하는 노래 ‘음부송’이 대표적이다.

여자라서 힘든 점은 무척 많았죠. 하지만 상황을 심각하게 보여주거나 내가 잘 모르는 여성 담론을 관객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았어요. 영화적 재미를 가장 염두에 뒀죠.”

배우 출신답게 자기 표현에 솔직한 남편이 김 감독과 사사건건 투닥거리는 상황은 ‘소꿉놀이’가 주는 큰 재미 중 하나다.


가장 어려웠던 며느리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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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사진=영화사 제공]

며느리가 되는 게 가장 힘들었죠. 엄마나 아내 역할은 어느 정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감히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최종 보스’ 같은 존재였어요(웃음).”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시댁에 들어간 김 감독은 친정과는 전혀 다른 시댁 문화에 점차 적응해 간다. 살뜰했던 시어머니와의 관계에 고부 갈등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네 집처럼 있으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진짜 내 집처럼 있다가 혼났다”는 김 감독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여실히 드러낸다.

“넌 며느리의 법도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어디 시어머니 앞에서!”라고 꾸짖는 시어머니 앞에서, 울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김 감독이 카메라 앞에 시어머니와 자신의 예민한 관계를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건, 카메라를 김 감독의 ‘제4의 눈’쯤으로 인식할 때까지 꾸준히 시댁 가족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덕분이었다.

김 감독은 시어머니와 남편, 갓 태어난 딸을 번갈아 찍으며, 뜻하지 않은 혼전 임신이 여러 사람의 삶에 미친 영향을 각각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됐다. 김 감독이 ‘소꿉놀이’를 여성영화가 아닌 “가족영화이자 성장영화”로 보는 이유다. 영화를 본 시어머니는 “인생의 단면을 잘 잡아냈다”며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인생의 소꿉놀이에서 ‘나’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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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사진=라희찬(STUDIO706)]

나는 애 엄마가 아니야, 그냥 나, 김수빈이라고!”

영화의 중반부, 아이를 씻기던 김 감독은 남편과의 말다툼 끝에 울음을 터뜨린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오롯이 ‘나’로 기억될 수 있을까. 김 감독이 영화 전체에 걸쳐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마침내 그는 그 대답을 얻었을까.

희생을 주고 성장을 얻었어요. 당장 뭘 성취해야 한다는 꿈이나 야망이 없어졌죠. 무엇보다 꿈이 없는데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가장 행복해요. 어차피 앞으로도 인생은 내 마음 같지 않을 거예요. 그저 삶에서 벌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겸허하고 용기 있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때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흥미롭진 않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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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소꿉놀이` [사진=라희찬(STUDIO706)]

김 감독이 ‘소꿉놀이’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사실은 간단하다. “인생은 다 소꿉놀이야”라는 영화 속 시어머니의 말처럼, 한 사람이 인생에서 수없이 마주치게 될 여러 가지 역할극을 슬기롭게 조율하고 수행하는 방법 말이다.

다만 김 감독은 “어떤 일이 닥치든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적인 소꿉놀이를 해야 한다”는 전제를 덧붙인다. 늘 창작자로 살겠다는 김 감독은 딸 노아가 커가는 과정을 촬영하겠다는 계획이다. 그의 소꿉놀이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 ‘감독 역할’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한국 다큐멘터리가 바라본 여성의 삶

‘소꿉놀이’는 20대 여성이 마주한 임신·결혼·육아·고부 갈등을 차례로 보여준다. 앞서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한국 사회와 가정 내 여성의 역할과 인권에 대하여 꾸준히 질문해 왔다.

임신 중절 경험 여성들의 증언을 담아낸 ‘자, 이제 댄스타임’(2014, 조세영 감독), 각각 비혼 커플과 미혼모의 육아 과정을 통해 결혼의 의미를 묻는 ‘두 개의 선’(2012, 지민 감독)과 ‘미쓰 마마’(2012, 백연아 감독)가 대표적이다.

육아를 통해 ‘엄마’의 역할을 탐구하는 ‘아이들’(2010, 류미례 감독), 여성 3대의 삶을 다루며 고부 갈등 문제를 살짝 내비친 ‘고추 말리기’(2001, 장희선 감독)도 있다. 대부분 자신이나 주변 이야기를 다룬 사적 다큐멘터리다.

김수빈 감독은 “내 경험담뿐 아니라 폐경기에 접어든 시어머니와 어린 딸을 보며 여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굳이 정색하고 여성 문제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여성의 삶에 대한 많은 질문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 셈”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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