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서류 서명요구하면서…'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서명'도 부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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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직원이 꼭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서명을 하긴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고 이름을 쓰려니…." 지난 19일 대출을 받기 위해 서울 강북구의 KEB 하나은행 지점에 다녀온 김모(54·여)씨는 불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은행원의 권유로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동참한 것에 대한 얘기였다. 그는 은행 업무를 도와준 직원의 부탁을 받고 서명지에 이름과 주소를 썼다고 했다. 김씨는 “돈 빌리는 사람 입장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서명은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은행연합회 등의 경제계 주도 진행되는 청원운동이다. 노동개혁법과 서비스산업기본발전법, 기업활력제고특별법의 조속한 통과를 국회에 요청하는 것으로 21일 현재 132만명이 서명했다. 하지만 이처럼 자발적 국민 참여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진행되는 곳도 있다.

경기도의 한 KEB 하나은행 지점에 근무하고 있는 은행원 김모씨는 지난 15일부터 상담 고객들에게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서명지를 나눠주며 서명을 유도하고 해왔다. 그는 "'취지를 설명하며 설득하든 감정에 호소하든 반드시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지점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객의 서명이 필요한 다른 서류와 섞어 이름과 주소를 받는 식으로 직원들이 서명지 끼워넣기까지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서울의 한 KEB 하나은행 지점 소속 박모씨는 “고객들에게 서명을 못 받으면 가족과 친척 명의로라도 서명지를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본지가 입수한 KEB 하나은행 내부 문서에는 ‘(입법촉구) 서명부 및 서명 인원을 영업점별로 취합해 제출해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업본부가 관할 지점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에 대해 KEB 하나은행 본사 관계자는 “행원들이 서명을 받는 것은 본사 방침과는 무관한 일이다. 협조 차원의 일을 일부 간부나 직원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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