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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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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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고은(1933~), ‘작은 배’ 중에서

인류가 처음 겪는 100세 시대
생명연장이 재앙이 안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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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이전에 들었던 음악을 평생 좋아하게 된다는 심리학 연구결과가 있다. 시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이 시는 고교 시절 조동진의 노래로 처음 접했다. 뭐 이런 시가 있나 싶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너무 단순했다. 그러나 행이 바뀌며 단어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문장의 여운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작은 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됐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는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이제까지는 사회적 지위만으로도 충분히 살만 했다.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은퇴하고도 최소한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삶의 내용을 채워나가지 않으면 생명연장은 축복이 아니다. 재앙이다. 주체적 삶이란 삶의 맥락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은퇴하여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삶의 목적도 추구하는 가치도 희미해지는 그 따위 ‘작은 배’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시 전문은 joongang.co.kr)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작은 배
-고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