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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의 근원은 과도한 기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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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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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며칠 새 중국인 지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중국의 대외정책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소속기관도 다르고 서로 면식이 없는 사이지만 두 사람의 말은 이구동성 이었다.

 -한국·미국은 북한에 영향력이 큰 중국이야말로 북핵 문제 해결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천만의 말씀. 북핵 문제의 근본은 미국과 북한(조선)의 갈등이다. 중국도 북한의 핵무장에 단호히 반대하지만 핵 문제는 미국이 북한과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는 북한이 대화를 거부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회담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강력 제재를 하자는 것이다.

 “석유·식량을 끊으면 북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인민이 피해를 본다. 제재만 하면 북한이 대화로 나올 것이란 논리도 찬성할 수 없다. 반대로 물어보자. 북한 정권의 돈줄을 말리는 게 목적이라면 한국은 왜 개성공단을 그대로 두나. 북한엔 최대의 현찰박스 아닌가.”

 물론 개성공단에서 당장 철수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북한 숨통 죄기에 중국이 앞장서라고 계속 압박하는 데 대한 불만을 그렇게 표시한 듯했다. 종북 세력이 아니라 한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인데도 북핵 문제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달랐다.

 4차 핵실험 이후 중국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이 한국 국내에서 퍼지고 있다. 이번만큼은 중국이 제재에 동참할 줄 알았는데 한쪽 발을 빼는 모양새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동참할 것이란 기대는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일 ‘역대 최상의 한·중 관계’가 야기한 착시현상 때문에 중국이 한반도의 미래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우리 편이 된 것처럼 과도한 기대를 가졌다면 그건 오해다. 여기엔 정부 당국의 책임이 크다.

 지난해 9월 박근혜 대통령은 천안문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회담한 뒤 “조속한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통일을 어떻게 이뤄나갈 건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두 정상 간에 긴요한 대화가 오갔다 해도 상당기간 비밀로 해뒀어야 할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섣부른 기대감이 퍼졌다. 외교 당국도 마찬가지다. 당국은 지난해 북한의 포격 도발 때나 이번 핵실험 직후 발표한 성명 문구를 과거 사례와 대조한 끝에 미세한 변화를 끄집어냈다. 남북과 미국 등 관련국 모두의 자제를 촉구할 때 써 온 ‘유관각방(有關各方)’이 단수 표현인 ‘유관방면’으로 바뀌었다거나 아예 ‘각방냉정’이란 표현이 사라졌다며 중국의 변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읽어냈어야 할 건 중국의 ‘변화’가 아니라 ‘변화 없음’이었다. 성명문 자구 해석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책임 있는 중국 당국자를 만나 성명에 담기 힘든 속내를 탐색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막중한 외교관의 임무다.

 북한을 전략적 부담이라기보다 전략적 자산으로 보는 중국의 시각에는 변화가 없다. 중국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 스스로 과도한 기대를 가졌다가 제풀에 실망한 건 아닌지 곰곰이 돌아볼 일이다.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