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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운 ‘아이 울리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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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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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아이는 자라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자란다. 자라는 보육(保育)과 배우는 교육(敎育)이 다르지 않다. 다섯 살짜리 조카딸이 어린이집 학예회에서 발레공연하는 깜찍한 모습을 가족 카톡으로 보았다. 언제 저렇게 훌쩍 자랐지 하는 경이로움과 세상의 질서와 문화를 하나씩 배워가고 있구나 하는 대견함을 느꼈다. 이 아이는 다행스럽게 경남 거제에 산다. 경남도의 유치원·어린이집은 서울과 경기, 광주, 전남·북에서와 달리 보육비 문제로 고통을 받지 않는다. 유치원 보육예산은 교육청이, 어린이집 예산은 교육청과 도가 사이 좋게 나눠서 대고 있다. 반면 내가 사는 경기도의 어린이집·유치원에선 비명소리가 들린다. 교육청은 법에 있는 유치원 예산의 1월치를 지원하지 않았다. 도의회는 어린이집을 남의 집 애들처럼 대했다. 서울시의 아우성은 더하다. 교육청이 유치원 예산만이라도 편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시의회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이재정, 활활 타는 불 남의 집 불인가
염태영 수원시장의 용기 있는 불 끄기

인구 5000만 명 규모의 나라 중 우리처럼 국민적 동질성이 강렬한 공동체는 드물 것이다. 그런 공동체에서 똑같은 아이를 키우는 데 경남은 걱정 없고 경기는 비명소리가 나고 서울은 더 큰 아우성이 터져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땅은 같아도 정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와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의 차이다.

어른의 세계에서 싸움은 대개 돈이나 권력, 자존심 때문에 생긴다. 이념·정책·생각의 차이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원인이야 어떻든 어른들의 대결로 아이들이 울게 해선 안 된다. 지난 한 달간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지방정부에서 벌어진 ‘아이 울리는 정치’는 한국 문명의 수준을 되돌아보게 했다. 안타깝고 수치스럽다.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와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는 위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르다. 문제제기형 정치가 한창 불이 붙고 있는데 불난 원인을 따진다면 문제해결형은 불부터 끄고 본다. 전자가 시비(是非)를 가리는 평론가형이라면 후자는 급한 일을 처리하는 행동가형이다. 보육대란에서 오래 남는 장면은 문제가 터지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이 청와대 앞에 달려가 1인시위를 한 것이다. 이 교육감은 ‘박근혜 대통령이 불을 냈다.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자기 집에 불이 붙으면 일단 불을 끈다. 누가 불을 냈는지는 나중에 따진다. 이재정씨는 문제제기형 정치인 같다. 문제를 풀어야 할 사람이 시민단체나 운동권처럼 시위를 하는 건 이상하다. 정치의 본령은 문제제기에 있지 않고 문제해결에 있다. 정치는 공동체의 최종 의사결정 영역이다. 정치인은 다른 데로 물러설 곳이 없다.

보육대란의 불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동시에 붙었다. 두 집에 동시 화재(火災)가 나도 평론형과 행동형 정치는 반응이 다르다. 서울시의회와 경기도의회는 유치원의 불만 끄려고 했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법률상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평론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유치원 불도 끄지 말자. 어린이집의 타는 불과 형평을 맞춰야 한다.’ 그래서 두 지방의회는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유치원 보육예산까지 전액 삭감해 버렸다.

훨훨 타는 두 집 불을 보면서 한 집 불만 끄느니 차라리 다 태우는 게 낫다는 희대의 궤변이 나온 것이다. 형평 논리를 잘못 써 망국적 평론이 된 사례다. 평론형·문제제기형 정치는 지방의회의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끌었다. 더민주의 지방 리더 가운데 행동형·문제해결형 정치를 보여준 인물도 있다. 염태영 수원시장이다. 그는 보육대란을 예견하고 어린이집 지원 예산을 독자적으로 짰다. 수원시 학부모들은 안심했다. 염 시장의 결정은 더민주의 당론과 배치된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새누리당 남경필 경기지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남 지사도 어린이집을 위한 배려예산을 집행했다. 경기도의회가 완고함을 꺾고 해결 과정에 합류한 게 어제다. 활활 타는 불길은 조금씩 잡히고 있다. 좋은 정치, 문제해결형 정치는 더불어민주당도 할 수 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