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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또 vs 한국 로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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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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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얼마 전 미국 로또 열풍을 보면서 ‘평균주의’란 단어를 떠올린 건 순전히 몇 년 전 작고한 김정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KB국민은행장인 그는 로또 전도사였다. 출입기자에게 “1억원짜리요” “10억원짜리요” 하며 로또 한 장씩을 건네곤 했다. 내가 로또를 처음 접한 것도 그때다(당연히 꽝이었다). 국민은행이 로또 판매에 뛰어든 것도 김 행장의 뜻이었다.

성과주의와 평균주의
어느 쪽이 진짜 희망인가

하지만 그는 로또가 너무 잘 팔리는 걸 원치 않았다. “대박 나셔요” 하면 “중박이 좋습니다”로 받았다.

“과하면 탈이 납니다. 당첨금이 올라가면 부러움이 질시로 변할 겁니다. 그럼 무슨 화가 생길지 몰라요. 한국 사회에선 그저 적당히 중간쯤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가 우려한 건 우리 사회의 평균주의였다. 그는 로또가 인기몰이를 하자 다른 은행의 견제나 정부의 제재가 닥칠 거라며 걱정했다.

로또는 이탈리아말로 ‘행운’이다. 1530년 ‘피렌체 로또’가 요즘 유행하는 번호 추첨식 복권의 기원이다. 미국 로또 파워볼이나 한국의 나눔로또도 여기서 따왔다. 뿌리는 같지만 둘은 많이 다르다. 당첨금부터 비교불가다. 지난 14일 미국 로또 당첨금은 16억 달러(약 1조9000억원)였다. 복권 사상 최고액이다. 그 주 한국 로또 당첨금은 164억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미국 로또는 무제한 누적식이다. 당첨자가 안 나오면 계속 당첨금이 쌓이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두 번까지만 가능하다. 당첨 확률도 미국이 많이 낮다. 파워볼은 2억9220만1338분의 1이다. 한 해 동안 벼락 맞을 확률(50만 분의 1)보다 584배나 어렵다. 한국의 나눔로또 814만5060분의 1에 견주면 36배나 당첨이 어렵다.

2002년 말 출범 때는 한국 로또도 미국 로또와 비슷했다. 1게임의 가격은 2000원, 당첨금도 5회까지 이월됐다. 하지만 두 달여 만에 ‘축소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8~10회차 로또가 이월되면서 당첨금이 835억9000만원까지 치솟은 게 화를 불렀다. ‘번호가 조작됐다’ ‘특정 지역에 몰아준다’는 음모론이 빗발쳤다. ‘한탕주의’ ‘사행심 조장’이라며 정부와 KB국민은행을 성토했다. 정부는 즉각 당첨금 이월을 2회까지로 제한했다. 이듬해엔 1게임의 가격도 1000원으로 낮췄다. 그후 10여 년, 다시는 835억원이란 당첨금이 나오지 않았다. KB는 몇 년 뒤 로또 사업권을 농협에 넘기고 만다.

김정태가 걱정했던 그대로다. 한국 로또는 ‘평균주의’에 질식해 쪼그라들었다. 잘났든 못났든, 운이 좋든 나쁘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많이 갖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평균주의. 잘나가던 외국어고와 과학고가 망가진 것도, 한국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노동·금융개혁이 지지부진한 것도 다 뿌리엔 평균주의가 있다. 잘한 만큼 더 대우받는 성과주의는 물론, 운 좋은 만큼 더 많이 가지는 ‘복불복주의’마저 배격하는 지독한 평균주의 말이다.

로또로만 따져도 빈부격차와 불평등, 모두 미국이 한국보다 더 크다. 미국 로또는 주로 서민 호주머니를 턴다. 고졸 이하가 대졸자보다 4배, 흑인이 백인보다 5배 복권을 더 산다. 한국 로또 구매자는 절반 이상(55.3%)이 월 400만원 이상 고소득자다. 월 소득 199만원 이하는 5.9%뿐이다. 그런데도 잘나가는 건 미국이다. 올해는 G2라며 뽐내던 중국을 멀리 따돌릴 기세다. 2007년 차이메리카란 조어를 만들어냈던 하버드대의 니얼 퍼거슨 교수는 이 말이 이젠 맞지 않는다며 취소했다.

이런 미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나. 성과주의다. 운이 좋거나 실력이 좋으면 누구나 저커버그가,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당장의 시련과 불만을 이겨낼 수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 10대 부자는 모두 당대에 사업을 일궜다. 한국은 모두 물려받았다. 지금 가난한 것, 불평등한 것은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도 가난할 것, 불평등할 것이란 절망이다. 한국의 평균주의는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