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우울증은 '마음의 병' 아니라 뇌혈관 막힌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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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에 사는 김모(68) 할아버지는 2년 전 무기력 증세를 보였다.

용인시 노인 1060명 상대 조사
혈관 좁아져 도파민 등 생성 막아
슬픔 느끼는 일반 우울증과 달리
통증 동반하며 매사 의욕 없어져
우울증과 막힌 혈관 함께 치료해야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잠만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고혈압과 당뇨병을 오래 앓았지만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다.

가족들은 쾌활한 성격이던 김 할아버지의 변화를 이상하게 여겼다.

병원을 찾은 김 할아버지는 뜻밖의 진단을 받았다.

뇌로 가는 혈관 일부가 막히면서 생긴 우울증이란 진단이다.

우울증은 실직이나 이혼 같은 심리적 충격을 받아 생기는 마음의 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65세 이상 우울증 환자의 대부분은 김 할아버지처럼 뇌혈관 질환이 원인인 혈관성 우울증 환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팀이 경기도 용인시 거주 65세 이상 노인 1060명을 대상으로 우울증과 뇌혈관 질환의 연관성을 조사한 결과를 11일 발표했다.

조사 결과 노인 우울증 환자 중 혈관성 우울증 환자 비율은 ▶65~69세 33.3% ▶70~74세 75% ▶75세 이상 100%였다.

노인의 우울증은 심리적인 원인에서 비롯됐다기보다 신체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연령대별로 혈관성 우울증의 유병률이 조사된 건 국내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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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노인 3명 중 한 명꼴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2014년 국내 65세 이상 노인 1만4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노인 우울증 환자는 10% 안팎으로 나타났다.

고연령대 우울증 환자가 주로 앓는 혈관성 우울증은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등으로 인해 뇌로 가는 모세혈관이 한 곳 이상 막히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환자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촬영(MRI) 장치로 찍어보면 뇌의 백질(신경섬유가 모인 부분)이 하얗게 보인다.

김 교수는 “세로토닌·도파민 등 사람의 기분을 결정하는 신경전달물질을 생성하는 부위의 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히며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 되면서 우울증이 생기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조사 당시 우울증 증세를 보이지 않았으나 뇌혈관이 막힌 것으로 관찰된 사람을 3년간 추적 관찰해 보니 이후 우울증을 앓게 될 위험이 조사 당시 뇌혈관이 정상인 사람에 비해 8배 높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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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년층이 앓는 우울증은 대부분 심리적 원인에 따른 것이다. 이에 비해 혈관성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증상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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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웅 교수

김 교수는 “보통 우울증 환자는 지속적인 슬픈 감정을 느끼는데 혈관성 우울증 환자는 매사에 관심과 의욕이 없어지는 게 특징”이라며 “어르신이 집 안에서만 가만히 있으려 한다거나 즐겨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말수가 줄어든다면 의심해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통증을 동반해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는데 우울증인 줄 모른 채 이 약, 저 약을 먹다가 오는 환자들도 있다”며 “뚜렷한 원인이 없는데 계속 아프다고 호소하거나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는 경우도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치료 방법도 다르다.

혈관성 우울증 환자에겐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에게 주로 쓰는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는다. 상담 치료도 큰 효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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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뇌혈관에 대한 치료와 함께 정신자극제·기분조절제 등 약물 치료를 함께해야 나아진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치매 등 인지기능 장애를 부르고, 자살 위험도를 높인다. 신체적인 문제로 생기는 우울증인 만큼 예방도 가능하다.

김 교수는 “걷기 등의 유산소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가장 좋은 예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 외에 매일 바깥에서 햇볕을 충분히 쬐고, 가족·친구 등과 자주 만나 대화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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