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녘에 돌아보니 … 꿈이 있어 찬란한 게 청춘이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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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새해가 밝았습니다’라고 적었다가 고쳐 썼습니다. ‘밝았다’는 서술어가 아무래도 걸렸기 때문입니다. 청춘에게 새해는 과연 밝은 기운으로 빛나는가.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좀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새해 첫 호만큼은 무언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보다 더 청춘처럼 살아가는 ‘최고령 현역’을 만나 새해 덕담을 들었습니다.

[젊어진 수요일] 청춘리포트- 노년이 바라보는 젊음
최고령 현역이 가라사대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헬조선과 수저계급론.

이 두 가지 키워드는 2016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춘 세대의 답답한 현실을 대변한다. 저 흉한 말들에는 희망 대신 절망이, 도전 대신 포기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아흔을 넘나드는 나이에도 끝없이 도전하는 청춘 같은 노인이 우리 사회엔 적지 않다.

이들 ‘최고령 현역’들은 “도전하고 일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청춘처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청춘리포트팀이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최고령 현역을 만나 ‘2016년 청춘의 길’을 물었다.

91세 의사 강재균
인생엔 힘든 일이 아흔아홉 가지야
그걸 이겨낼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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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균 할아버지가 20대 시절 사진을 꺼내 들었다. 청춘의 의미를 묻자 ‘청춘은 성실’이라고 답했다.

강재균 할아버지는 91세의 나이에도 하루 평균 20여 명의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다. 1964년 전주에 ‘강 이비인후과’를 개원한 강 할아버지는 53년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환자를 돌봤다. 그간 그를 거쳐 간 환자만 35만여 명. 함께 의대(서울대)를 다닌 동기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제 가까운 친구마저 몇 명 남지 않았다고 한다. 50여 년간 일해 왔으니 지칠 법도 한데 강 할아버지는 여전히 스스로를 ‘나이 든 청춘’이라고 말한다.

강 할아버지는 5포 세대(취업·연애·결혼·출산·주택을 포기한 세대)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청춘들에게 ‘즐거운 일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내가 90이 넘도록 살아보니 세상에는 99가지의 힘든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은 한두 가지뿐이더라고요. 99가지의 힘든 일을 모두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는 한 가지의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진심이 필요해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자문해야죠. 진심이 없으면 주변에 휘둘리게 돼 무언가를 억지로 하게 되고 결국 내 열정도 달아날 수밖에 없죠.”

강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때 환자를 돌보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병사들이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 짜릿한 성취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세상 사람들이 재밌고 즐겁다고 이야기하는 걸 수도 없이 해 봤지만, 여전히 흰색 가운을 입고 환자들과 마주 앉을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환자들을 끝까지 돌보고 싶어요.”

89세 명창 박송희
일흔 넘어 인간문화재 … 난 늘 늦었지
뭐든 꾸준히 하면 인정받게 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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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희 명창과 20대 시절의 공연 사진. 박 명창은 ‘청춘은 무한도전’이라며 청년 세대를 격려했다.

박송희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다. 올해 89세로 최고령 소리꾼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소리와 음악에 대한 열정은 후배들 못지않다. 지난해 9월 제자인 소리꾼 민혜성(44)씨와 함께 국립국악원 무대에 올라 판소리 ‘숙영낭자전’을 완창했을 정도다. 박 명창은 열네 살에 ‘권번(券番·일제시대에 전통 예술을 가르치던 학교)’에 입학한 이후 지금도 매일 4~5시간씩 연습하는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 뭐든지 늦었지. 30대 후반에야 판소리 스승을 만났고, 일흔둘에 문화재가 됐으니….”

박 명창은 60여 년간 소리를 해 오면서 늘 남들보다 한 발자국씩 뒤처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청춘들에게 ‘꾸준함’을 강조했다. 좋은 환경에서 시작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꾸준함이 없으면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조언이다.

“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소리를 합니다. 쉬는 날엔 목에 가시가 돋치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꾸준히 그날 해야 할 일들을 해온 게 소리를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제 마지막 목표는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계속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네요. 마음먹은 대로 열심히 도전하면 누군가 반드시 알아줍니다. 조금 늦더라도 괜찮아요.”

81세 음대생 변현덕
‘100세 공연’ 목표로 피아노 열공 중
안 힘드냐고? 마음이 젊으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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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현덕 할아버지와 고등학생 시절의 사진. 그는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했다.

지난해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한 변현덕(81) 할아버지는 최고령 대학 신입생이다. 60년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했지만 피아니스트의 꿈을 놓지 못했다. 꾸준히 도전한 끝에 결국 50여 년 만에 같은 대학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는 현재 본인보다 60살 이상 어린 손자뻘 학생들과 함께 피아노 공부를 하고 있다.

 서울대 입학 후 변 할아버지는 매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하루 8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도 교양 과목을 공부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며 웃었다.

 변 할아버지의 최종 목표는 ‘100세 공연’이다. ‘100세가 되려면 아직 20년이나 남았는데 계속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피아노는 몸으로 치는 게 아니라 정신력과 마음가짐으로 치는 거예요. 어린 친구들과 달리 나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걸 경험해봤기 때문에 오롯이 피아노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몸은 늙었을지 몰라도 저는 여전히 제가 20~30대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거든요. 청춘이라는 건 결국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젊고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정진우·백수진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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