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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사재혁’은 언제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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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훈 기자 중앙일보 스포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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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훈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역도 국가대표 사재혁(31)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역도 77㎏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스포츠 스타다. 4년 뒤 런던 대회에서는 경기 도중 팔꿈치가 꺾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바벨을 놓지 않은 투혼으로 국민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무려 7차례의 수술 끝에 재기한 ‘오뚝이 역사(力士·사재혁의 별명)’는 올해 8월 리우 올림픽에서 다시 세계 정상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재혁은 더 이상 플랫폼(역도 경기장)을 밟지 못한다. 지난해 말 강원도 춘천의 한 술집에서 대표팀 후배 황우만(21·한국체대)을 때려 광대뼈 골절 등 전치 6주의 중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대한역도연맹은 지난 4일 사재혁에게 자격정지 10년의 중징계를 내렸다. 대표팀에서도 즉시 제외했다. 사재혁은 향후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올림픽 금메달 연금(매달 100만원)도 받지 못한다.

 정부는 대한체육회와 손잡고 2014년 1월 ‘스포츠계 4대 악(惡)’을 발표하며 ▶승부조작 및 편파판정 ▶입시 비리 ▶조직 사유화와 함께 ▶폭력(성폭력 포함)을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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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후배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가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사재혁. [뉴시스]

 그런데도 체육계의 폭력 관련 잡음은 종목과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 남자 쇼트트랙 간판 신다운(23·서울시청)이 지난해 9월 대표팀 훈련 도중 후배 선수들을 폭행했다. 남종현(72) 전 대한유도회장은 지난해 6월 유도 관련 행사에서 산하 연맹 회장의 얼굴에 맥주컵을 집어 던져 중상을 입힌 뒤 사퇴했다. 경찰청이 운영하는 ‘스포츠 4대악 신고센터’에 접수된 폭력 관련 제보는 매년 증가 추세다. 2011년 100건이던 폭력 관련 제보가 2012년 122건, 2013년 135건에 이어 2014년엔 151건으로 늘었다.

 운동선수들에게 ‘금메달’과 ‘우승’ 등 좋은 결과만을 강조하다 보니 스포츠계에 폭력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도 있다. 이건영 경북대 교수는 “사재혁이 후배를 구타한 행위는 일종의 ‘성취 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성취 증후군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한 사람이 막상 그 목표를 이룬 뒤엔 공허함과 허탈감에 시달려 도덕적·정신적 해이를 일으키는 현상이다. 그는 “전성기가 짧은 운동선수는 성취 증후군도 빨리 온다. 사재혁은 2008년 올림픽에서 우승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고, 은퇴의 두려움은 점점 커지는 이중 압박이 일탈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재혁의 후배 폭행 사건은 ‘운동선수는 맞으면서 커야 한다’는 체육계의 그릇된 고정관념이 낳은 불상사다. 이뿐만 아니라 정상에 오른 선수에게 다음 목표를 보여주지 못하는 ‘엘리트 시스템’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체육계는 구태를 벗어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폭력범으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상황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송지훈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