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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맛 나게 하는 뻔하지 않은 상상력…이들이 작은 영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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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디자이너는 세상을 뒤흔드는 뉴스의 주인공은 아니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펼쳐 더 따뜻하고 희망적인 세상을 만든다. 그들은 뻔한 생각에 안주하지 않는다. 남다른 창의력을 발휘해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킨다. 장애와 시련을 희망의 원동력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우리 사회 컬처디자이너 7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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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도시양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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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에서 사람도 잘살죠. 도시양봉가 1만 명 육성이 1차 목표입니다.

 ◆남과 다른 시각, 나만의 상상력=박진(32) 어반비즈서울 대표는 명동·노들섬 등 서울·경기 지역 19곳에서 꿀벌을 키우는 도시양봉가다. 120여 개 벌통에서 연간 1∼1.5t의 꿀을 수확한다. 도시양봉가 육성 교육도 한다. 초등학교 4학년생부터 75세 노인까지 수강생이 500여 명에 이른다.

[2016 연중기획 매력 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도심 양봉가 박진
위험한 놀이터 편해문
폐가 재발견 김영민

 4년 전 공기업 직원이었던 박씨는 서울 근교 주말농장에서 토마토를 길렀다. 열매가 잘 맺히지 않아 농장 주인에게 물으니 “벌이 없어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시에 벌이 살게 하자’는 아이디어가 번뜩 스쳤다.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으고 방송통신대에서 농업학 학위를 땄다. 2013년 박씨는 사표를 내고 회사를 차렸다.

 박씨는 꿀벌이 도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돌본다. 벌에게 설탕물을 먹이지 않고 농약·항생제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신조는 “벌이 살아야 (지구)별이 산다”다. “도시 생태계를 살린다”는 사명감도 크다.

 박씨는 내년 사업으로 ‘허니 뱅크’를 구상하고 있다. 투자를 받아 도시양봉장을 늘리고 수확한 벌꿀로 보상해 주는 방식이다. 저소득층을 교육시켜 벌을 기르게 하면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효과도 있다. 얼마 전 박씨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다녀왔다. 공원 조형물로 활용될 수 있는 벌집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서다. “1만 명의 도시양봉가를 육성하는 게 첫 번째 목표”라는 박씨는 “세계 도시양봉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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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폐가살리기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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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가 방치되면 주변 공간도 같이 열악해져요. 폐가 살리기는 결국 마을을 살리는 일이죠.

 제주폐가살리기협동조합 대표 김영민(36)씨의 아이디어도 독창적이다. 2010년 서울에서 제주로 거주지를 옮긴 김씨는 월급 60만원의 농장 일꾼으로 살았다. 어느 날 그의 눈에 흉물이 돼 방치된 폐가가 들어왔다. 도시로 떠난 주인에게 버림받아 생명력을 잃은 집이었다. ‘폐가를 살려 마을 놀이터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그는 제주 한림읍에 둥지를 틀고 폐가 주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흉물이 된 폐가를 찾아 5년간 무상임대를 받았고 3개월 동안 수리를 했다. 수리 비용은 크라우드펀딩으로 모은 1000만원으로 충당했다. 김씨는 그렇게 되살린 폐가를 1년 동안 조합 사무실로 썼다. 그는 “폐가는 기대가 없는 공간이어서 좋다”고 말했다. “관심을 두는 순간 살아나고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건축학과 대학생들이 폐가로 졸업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도 많이 한다”고 했다.

 처음엔 돈 안 되는 폐가를 왜 살리느냐고 했던 주민들도 이젠 김씨에게 “내가 도와줘?”라며 관심을 보인다. 직접 땅을 일구기도 하고 밥이며 간식을 챙겨 주기도 한다. 김씨는 “되살린 폐가를 보고 주민들이 ‘저렇게 쉬운 일이면 우리 주변 폐가도 살려 보자’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목표”라며 “절반은 이룬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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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문(놀이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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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위험을 만나 위험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일상에서 안전을 지킬 수 있죠.

 놀이운동가 편해문(46)씨는 “놀이터는 위험해야 한다”는 색다른 주장을 펼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위험을 만나 위험을 다루고 피하는 방법을 배워야 일상에서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아이들의 놀 권리다. 그는 “아이들은 어린 시절 놀면서 길러진 힘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면서 “안전을 핑계로 아이들의 놀이를 통제하지 말라”고 했다.

 편씨는 ‘애들 노는 꼴 못 보는’ 어른들에게 할 말이 많다. 지난 20여 년 동안 수많은 부모·교사들을 만나 놀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등의 책도 펴냈다. 다음달 준공을 앞둔 전남 순천의 ‘제1호 기적의 놀이터’의 총괄 책임도 맡았다. 지역 주민들과 아이들이 직접 디자인에 참여해 만드는 놀이터다. 그는 “준비과정에 2년이 걸렸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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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정부(특수구두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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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예쁜 구두 신는 게 소원이에요. 그래서 새 디자인 계속 연구합니다.

 ◆핸디캡을 매력으로=60년 동안 구두를 만들어온 남궁정부(75)씨는 특수구두의 장인이다. 한쪽 다리가 8㎝ 짧은 소아마비 여성, 발뒤꿈치가 없는 예비신부, 제대로 못 걷는 당뇨 환자 등이 그의 단골 고객이다. 1955년 구둣방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을 시작한 그가 특수구두에 눈을 돌린 건 96년 지하철 사고로 오른팔을 잃으면서다. 그는 “인생이 끝났다 싶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남궁씨는 관절염·무지외반증·짝다리 등으로 시중에서 신발을 구할 수 없는 고객들을 위해 특별한 구두를 제작했다. 20년 동안 만든 구두 10만여 켤레 중 똑같은 구두는 하나도 없다. 컴퓨터로 고객의 족압을 측정해 발 전체에 힘이 골고루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발이 없는 경우엔 가짜 발을 만들어 신발을 제작했다. 직원 12명과 함께 만드는 특수구두는 하루 6∼7켤레. 수익이 나지 않아 처음 10년은 직원 월급도 제때 못 줬다. 그는 “문 닫을 위기도 있었는데 단골들이 찾아와 ‘당신이 없으면 우리가 못 걷는다’며 돈을 모아 주기도 했다”고 했다.

 남궁씨는 특수구두 의료보험 적용을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 8년간 틈틈이 전국을 돌며 서명을 받았다. 2005년부터는 장애인 특수구두에 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장애인들을 교육시켜 특수구두 제작자로 키우는 게 다음 목표”라며 “나 같은 장애인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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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혜(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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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긍(아름다운 긍정)’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립니다. 못 산다던 나를 살린 게 긍정의 힘이죠.

 일러스트레이터인 강주혜(36·여)씨도 장애를 자신만의 매력으로 승화시킨 경우다. 2003년 강씨는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한 달 넘게 의식불명 상태였다.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났지만 몸 오른쪽이 마비됐다. 눈 한쪽은 실명됐고 나머지 한쪽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강씨는 재활치료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계속 마비가 진행되는 오른팔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하루 100장씩 드로잉을 했다.

 그의 그림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늘 5도가량 기울어져 있다. “처음엔 삐뚤어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울면서 다시 그렸죠. 하지만 이젠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게 내 그림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2013년 자신의 그림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열었고, 책 두 권의 일러스트도 그렸다.

 수없이 힘든 순간을 극복했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강씨는 ‘긍정의 힘’이라고 말했다. “제 호는 ‘미긍(美肯·아름다운 긍정)’이에요. 긍정은 유행을 타지 않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은 필요하죠. 긍정은 긍정을 낳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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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진(1+1 비누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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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면 기쁨은 배가 되죠. 작은 일부터 타인을 돕는 나눔 습관이 행복의 지름길이고요.

 ◆같이 나누는 가치=천연비누 제조업체 ‘소프 컴패니언’ 대표 정명진(34)씨는 2013년부터 ‘1(소비)+1(기부)’ 운동을 펼치고 있다. 판매한 비누 수만큼 저개발국가 아이들에게 비누를 기부한다. 정씨는 “일상생활과 나눔을 연결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정씨는 매년 인도네시아 등 저개발국을 방문해 여성들에게 비누 제조법을 가르쳐 자립을 돕는다. 아이들에겐 손 씻기와 이 닦기 등 위생교육을 한다. 지난 3년간 그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3000여 명에 이른다. 그는 “지난해 인도네시아 현지 여성들로부터 받은 편지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배운 비누 제조법을 응용해 주방세제를 만들고 버려진 페트병에 담아 팔았더니 대박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정씨는 “편지를 받고 펑펑 울었다. 단순히 구호물자에만 기대지 않고 자립 노력을 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정씨가 구호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부터다. 그는 2008년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외무공무원(7급) 시험에 합격해 도미니카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티의 구호 업무를 맡아 파견 간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정씨는 2013년 공무원직을 버리고 캄보디아·르완다 등을 누비며 구호 활동을 했다. 현장에서 그가 발견한 가장 큰 문제는 개인 위생이었다. 비누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씨는 “저개발국 질병 원인은 대부분 더러운 물과 그로 인한 전염병”이라며 “하찮아 보이는 손 씻기 등 위생교육이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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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환(호스피스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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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번의 죽음을 보면서 깨달은 건 ‘오늘을 사랑하라’입니다. 오늘의 행복을 미루지 마세요.

 정씨가 비누 ‘1+1’으로 나눔의 가치를 확산했다면 호스피스 전문의 김여환(50·여)씨는 죽음을 통해 삶의 중요성을 전파했다. 김씨는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센터장으로 8년간 근무하며 말기암 환자 960여 명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부모와의 이별 앞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았던 11세 소녀부터 금고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 남편이 밉다며 임종실을 박차고 나간 할머니까지 죽음과 삶의 민낯을 수없이 지켜봤다. 김씨는 “아무리 준비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게 죽음”이라며 “하루하루 행복하고 열심히 사는 게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김씨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며 사람들의 멘토가 됐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헬스트레이너로 변신했다. 그는 “운동은 오래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가장 중요한 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지영·이영희·윤석만·채윤경·정아람·장혁진 기자, 사진=오종택·김경빈·조문규·권혁재 기자, 프리랜서 공정식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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