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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철근의 시시각각

청년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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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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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여주인공 나정(고아라)은 연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온 재원(材媛)이다. 불경기였던 1997년 말 그녀는 고려증권에 합격했다. 가족들과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기쁨은 잠시 TV에서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흘러나온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하루입니다.” 아나운서가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전한 것이다. 결국 나정은 고려증권의 부도로 출근도 못하고 백수가 된다. 나정은 애인 ‘쓰레기’(정우)와의 결혼마저 미룬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울컥할 정도로 격한 공감을 했다. 고려증권에 다니던 대학 동창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6년차 직원이었던 친구를 받아주는 직장은 한곳도 없었다. 그 친구는 휴대전화 대리점, 벤처기업, 룸살롱 경영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냉혹한 사회는 패자 부활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 사회 초년병들에게 해고는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젊은 직원들까지 내몰면서 중국기업 감당할 수 있을까

 두산인프라코어가 20대 신입사원에게도 명예퇴직을 종용하다 논란이 일고 있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신입사원은 희망퇴직에서 제외하라”고 지시했다지만 신참 사원들도 감원 한파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사의 구조조정을 놓고 시비 걸 생각은 없다. 올 3분기까지 누적 당기 순손실액이 2465억원이나 된다. 한때 노다지로 여겨졌던 중국 건설기계 시장은 지난해보다 50%나 축소됐다. 세계 1위 캐터필러도 최근 4년간 2만7000명을 감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조정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 경쟁력 없는 부문부터 정리해야 하고, 감원은 최후의 선택이 돼야 한다. 최소한 젊은 직원에겐 계열사로 전직시키는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대기업은 노조가 강한 생산직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만만한 사무직만 자르고 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올해 두 차례 사무직 고참 위주로 희망퇴직을 받았다. 생산직은 감원할 수 없으니 이번엔 마른 수건을 짜듯이 신참 사무직까지 칼을 들이댄 것이다. 헤드헌터를 통해 다른 직장을 알아보려면 최소한 경력 7년 이상의 과장급은 돼야 한다. 이 정도 경력도 안 된 사무직에게 나가라는 것은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시(公試)’를 준비하든지, 굶어 죽든지 알아서 하라는 무책임한 짓이다. 이제 겨우 ‘미생(未生)’을 벗어날 희망을 꿈꿔온 사회 초년병들에게 희망퇴직은 ‘사석(死石)’으로 버려지는 것이다.

 잠실 면세점 사업권을 잃은 롯데그룹은 면세점 직원들을 롯데쇼핑 등 계열사에 재배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으로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지만 롯데그룹에 다른 대기업들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채용에 신중하되 한번 뽑은 직원은 정년을 보장한다는 전통이다. 신격호 회장은 임원들에게 “직원 한 명을 자르는 것은 그 가족들까지 고통을 주는 일”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외환위기 때 부채비율 3000%를 넘은 롯데삼강을 구조조정할 때도 신 회장은 아래에서 올라온 계획안을 몇 차례나 퇴짜를 놔 감원 규모를 최소화했다. 효율이란 관점에선 낡은 경영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롯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

 롯데그룹은 야구단 투자에 인색해 골수 롯데팬 중에도 ‘안티’가 많다. 그러나 기업의 본질적 역할은 고용 창출이지 야구단 경영이 아니다. “공놀이 하는 사람에겐 4년에 100억원을 보장하면서 두산맨이 되고자 들어온 1, 2년차들을 푼돈 쥐여주며 추운 날 쫓아내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이 글에 공감하는 이유는 대기업의 고용 기여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미래다. 두산그룹의 광고 카피는 정곡을 찌른다. 그렇다. 사람, 특히 청년이 없으면 기업이나 국가의 미래도 없다. 젊은 인력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기업과 국가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대기업이 청년 고용을 줄이면서 경쟁력 강화를 얘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청년들을 이렇게 벼랑 끝으로 몰아놓고 우리 기업이 중국 기업의 ‘인해전술’을 감당할 수나 있을까.

정철근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