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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위기인 듯 위기 아닌 위기 같은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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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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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경제부장

‘한국, 과감한 인플레 정책 펼 때다’. 지난해 11월 19일자 중앙일보 1면 머리기사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허우적댔던 디플레이션 늪에 우리도 빠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당시 소비자물가는 24개월 연속 1%대로 기고 있었다. 필자는 2월 1일 이 자리에 ‘사이렌의 달콤한 유혹, 디플레이션’이란 칼럼을 썼다. 1990년대 초반 일본 물가가 1%대로 가라앉자 ‘착한 디플레이션’이라며 반색했던 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환기였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고 일축했다. 한데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12월부터 11개월 연속 0%대로 주저앉았다. 올 1월 1일 담뱃값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구경할 뻔했다.

 그제야 정부와 한은은 16일 내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디플레이션과의 전쟁’을 공식화했다. 한은이 뛰는 물가를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추락하는 물가를 떠받치겠다고 선언한 건 50년 설립한 후 처음이다. 한데 선전포고 하루 만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7년 동안 이어진 ‘제로(0)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처 디플레이션과 싸울 채비도 하기 전에 무장해제부터 당하게 생겼다. 국제 금융시장의 풍향계가 바뀔 때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노릇을 했던 한국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다. 미국을 따라 금리를 올리자니 디플레이션 악몽이 떠오르고, 그냥 있자니 ATM 돌아가는 소리에 가위눌린다.

 그렇다고 당장 97년 같은 외환위기와 맞닥뜨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지난달 한국은 무역에서 104억 달러 흑자를 냈다. 사상 최대 규모다. 올 10월까지 경상수지도 879억 달러 흑자다. 외환보유액은 3685억 달러나 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한 해 1000억 달러 흑자를 낸 나라가 국가 부도를 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역대 최고인 ‘Aa2’로 올렸다. 일본보다 2계단이나 높다. 그러나 사상 최대 무역 흑자가 달갑지만은 않다. 수출이 늘어서가 아니라 수입이 더 빨리 줄어 생긴 ‘불황형’ 흑자라서다. 한국은 원자재를 사다 중간재로 가공해 수출하는 나라다. 수입 감소는 앞으로 수출도 죽을 쑬 거란 예고편이다. ‘무역 흑자의 역설’이다.

 수출이 가망 없다면 내수에라도 기대야 한다. 한데 물가는 사실상 마이너스 저공비행이라는데 도무지 서민 장바구니는 가벼워지질 않는다. 담뱃값 인상으로 서민 호주머니만 홀랑 털렸다. 천정부지 전셋값에 허리가 휜다. 국제 유가는 사상 최저치인데 시내버스·지하철 요금은 잇따라 올랐다. 내년에도 소주 값부터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줄줄이 인상 대기 중이다. ‘13월의 보너스’였던 연말정산마저 ‘13월의 울화통’이 됐다. 물가가 떨어지면 씀씀이에 여유가 생겨야 하는데 되레 서민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그럴수록 허리띠만 더 졸라매니 물가는 더 떨어진다. ‘저물가의 역설’이다.

 일본이 디플레이션 악몽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세도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았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 87년 헌법 개정 후 처음 과반 이상 지지율(51.6%)로 당선됐다. 잇따른 총선거와 지방선거에서도 연전연승했다. 어느 정치인보다 흔들림 없는 지지층도 자랑한다. 게다가 야당은 지리멸렬하다 못해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풍비박산 직전이다. 그런데도 여대야소인 19대 국회는 사상 최악이란 오명을 남기게 됐다. ‘강한 리더십의 역설’이다.

 뜨거운 물에 빠진 개구리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위기가 닥친 걸 피부로 절감하기 때문이다. 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랬다. 그러나 찬물에서 서서히 데워지는 비커 속 개구리는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위기인 듯 위기 아닌 위기 같은’ 착각에 빠져서다. 세 가지 역설의 덫에 걸린 한국 경제가 꼭 그 모양이다. 물이 뜨겁다면 발버둥이라도 치련만 아직 견딜 만하니 넋 놓고 있다. 앗 뜨거라 싶을 땐 이미 늦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