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꽃 하나에도 기도해요 … 몸은 낡아가도 연기는 새롭게 해달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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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기 안에 숨겨진 여러 인물을 꺼내는 직업이다. 김혜자를 여러 거울을 이용해 한 화면에 담았다. 그는 요즘 ‘청담동 살아요’ 웹시리즈를 즐겨보고 있다고 했다. 3년 전 방영된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최근 조회수 220만 회를 넘어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단풍은 나무에만 지는 게 아니다. 사람도 곱게 물든다. 지난 7일 목마른 땅에 단비가 내렸던 날, 서울 정동 이화여고100주년기념관 화암홀.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작·연출 하상길)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 김혜자(74)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눈가에 발그레 생기가 번졌다. “오늘이 네 번째 공연인데 가장 잘됐어요”라며 즐거워했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연극무대에 다시 오른 ‘국민엄마’ 김혜자
실제는 훌륭한 엄마·아내 역할 못해
‘여보’ 한번 못하고 보낸 남편 생각 나
연극은 실수하면 끝, 연습밖에 없어
치매 걸려 대사 못 외울 때까지 할 것

 ‘길 떠나기 좋은 날’(다음달 20일까지)은 ‘국민엄마’ 김혜자의 생얼굴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홀로 수녀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암에 걸린 여인으로 나온다. 그렇다고 무대가 쓸쓸한 건 아니다. 낙담한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위로가 화수분처럼 쏟아진다.

분장실에서 만난 김씨에게 작은 국화 다발을 내밀었다. 그가 “어머, 너무너무 예쁜 꽃이네요. 큰 건 필요 없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던 그 아닌가. 1963년 KBS 탤런트 1기로 데뷔한 이후 벌써 연기 인생 반세기,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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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에서 부부로 나오는 배우 김혜자와 송용태. 아래 사진은 김혜자의 연극 대본. 곳곳에 연기 포인트를 적어놓았다. “못하는 사람일수록 대본이 지저분하다”라며 겸손해했다.

 - 희곡도 무대도 매우 예쁩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많이 나와요. 신파로 흐를까 봐 굉장히, 굉장히 조심했어요. 너무 고운 얘기를 하면 ‘너 뭐하냐’ 이럴 것 같아서. 일상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 했어요. 얘기가 공중에 떠 있으면 안 되죠. 밥하고 빨래 하는 엄마인데, 시처럼 하면 되겠어요?”

 - 지난해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으로 연극에서 떠난다고 했었는데요.

 “4년 전에 처음 이번 책(희곡)을 받았는데, 그때에는 못한다고 했어요. ‘소녀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는데, 자칫 그런 면만 부각될 것 같았죠. 그런데 연출가가 그간 많이 고쳤더라고요. 정말 내가 되고 싶은 여자의 모습이 들어 있었어요.”

 - 어떤 면이 그렇습니까.

 “다리를 다친 축구선수 출신의 남편을 격려해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가난한 나라의 흑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딸을 북돋아주고…. 그리고 남편 힘들지 않게 수녀원에 가서 임종을 맞고, 다 그런 여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마을 사람들도 언제나 (그녀를) 좋게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요.”

 - 연극은 매회 새로울 것 같습니다.

 “100분의 1초도 긴장을 늦추면 안 돼요. 번개 같은 순간에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영화나 드라마처럼 편집이 없잖아요.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연습밖에 없어요. 잠들기 전에도 읽고, 또 읽어봐요. 여기서 이렇게 했으면 좋을 텐데, 어저께 미처 몰랐구나, 이런 걸 계속 발견해요. 매일매일이 시작이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드라마 쪽 대본은 정말 곤란해요. 미리 줘야 연구를 하죠.”

 - ‘국민엄마’ 칭호가 부담스럽겠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 바뀌었어요. 보름 전께 한 잡지 편집장에게 카드를 받은 적이 있어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전원일기’에서 방 닦고 밥하는 저를 보면서 ‘엄마는 저런 일을 하는구나’를 알았다는 거죠. 저는 훌륭한 엄마가 아니에요. 엄마 연기를 잘했을 뿐이죠. 그런데도 위로가 됐다니….”

 - 독실한 기독교인 아닌가요.

 “엄마 배 속부터 교회에 다녔어요. 교회 다닌다고 하나님을 다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엉터리 교인도 많잖아요. 개독교 소리를 듣기도 하고. 좋은 설교 듣고 나가서 주차장에서 싸움하고 그렇잖아요. 서로 차 부닥친다고 멱살도 잡고.”

 -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엉터리 신자였죠. 하나님을 만난 건 얼마 안 됐어요. 4년 전 영화 ‘마더’로 LA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받고, 딸과 함께 한인교회 새벽예배에 갔을 때 이유도 없이 눈물이 터지는 거예요. 이후 사람들이 내 얼굴이 달라졌다고 해요. 마음에 기쁨이 넘치니까 얼굴이 밝아진 거죠. 경기여고 2년 후배인 유중근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성경 공부도 하고.”

 - 매우 신비한 경험입니다.

 “20년 전에 담배를 끊은 것도 딸의 기도 덕분이죠. 그전에는 성경을 보면서도 담배를 피웠어요.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그러는 모습에 너무 속이 상해 ‘나쁜 놈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라며 담배를 태우고 그랬어요. 성경을 감정적으로 본 거죠.”

 - 연극에선 남편이 신을 원망하는데요.

 “예전에 아프리카에 갔을 때 ‘하나님, 이 다섯 살도 안 돼 죽는 아이들은 왜 만드셨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즘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어요. 성경에도 아기처럼 믿으라고 했잖아요. 간단한 예로, 높은 곳에 있는 아기도 아빠가 손뼉을 치며 ‘이리 와’ 하면 뛰어내리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알 것도 같아요.”

 - 1998년 먼저 떠난 남편 생각도 났겠죠.

 “연극에선 ‘여보’ ‘여보’ 하는데 실제로는 ‘여보’ 소리를 한 번 하지 못했어요. 무안해서 맨날 ‘있잖아요’ ‘자기가’ 그랬죠. 남편한테 잘못한 게 참 많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이 저보다 열한 살 많거든요. 아내로서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연기를 할 수 있었죠.”

 - 선친께서도 배우를 말리지 않으셨고요.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처럼 공부를 많이 하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배우가 되라고 하셨어요. 드라마든, 영화든, 연극이든. 저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작품을 고르려고 해요. 보고 나서 ‘뭐 하자는 거야’ 그런 건 피해왔죠.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가 좋아요. 나잇값도, 이름값도 해야 하는데, 뭐 때문에 나쁜 것을 하고 싶겠어요.”(웃음)

 - 유언도 이미 써놓았다고 들었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놀랍다고 하는데, 제가 오히려 이해가 안 돼요. 이번 작품도 죽음을 곰곰 생각하게 하죠. 유언은 나이와 상관없어요.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식구들 괴롭히지 않고 숨을 거두면 행복할 것 같아요. 혹시 내가 아프면 열흘까지는 괜찮은데, 더 이상의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했어요.”

 - 뭐가 절박한 게 있었습니까.

 “절박해서가 아니라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거예요. 자식들 편하게 해줘야죠. 영정사진도 준비해 놓았어요. 오늘 찍은 사진이 아름다우면 그것으로 바꿀 거예요.(웃음) 죽음만큼 명약관화한 게 있나요? 회피한다고 회피할 수 없잖아요. 연기도 그래요. 고생했던 순간, 즐거웠던 경험을 다 녹여내는 거죠. 모든 게 도움이 돼요. 배우에게 헛된 시간은 없어요.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 월드비전 활동도 25년째입니다.

 “매사가 감사할 뿐이에요. 11년 전 나온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가 지금도 팔리고 있어요. 인세는 월드비전에서 관리하죠. 매달 아프리카 아이들 103명에게 3만원씩 보내는 것도 2019년 치까지 미리 내놓았어요. 제가 언제까지 돈을 벌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돈이 생기면 아이들 것부터 챙겨둬요. 그게 제일 걱정되니까.”

 - 연극 마지막 대사가 “우리…, 참 잘살았지요?”입니다. 배우로서 만족한 삶이었나요?

 “잘못 살았을 때가 더 많았죠.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또 잘못했구나,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를 되풀이해 왔어요. 치매에 걸려 대사를 외울 수 없을 때까진 연기를 하겠죠. 성경 말씀처럼 몸(겉사람)은 낡아 가도 마음(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 뿐입니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연기 꽃피게 해준 김수현, 몰랐던 나를 깨워준 봉준호, 믿음 키워준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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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수현, 봉준호, 김형석.

배우 김혜자의 연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 누구보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72)을 빼놓을 수 없다.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등 숱한 화제작에서 함께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김수현씨예요. TV에서 나를 꽃피게 해주었죠. 이런저런 엄마 역을 맡겼잖아요. 요즘은 만날 일이 별로 없지만 그전에는, 참, 너무 좋아했어요. 정말 잘 쓰니까. 배우들이 (김수현씨를) 무서워하는데, 뭐가 무서워요. 써 있는 대로 하지 못하니까 무섭지, 그 사람이 쓴 대로만 하면 기가 막혀요.”

 김씨는 ‘마더’의 영화감독 봉준호(46)에게도 각별한 마음을 전했다. “정말 나의 새로운 것을 끌어내준 사람”이라고 고마워했다. “그 사람이 뭐라 한지 아세요. 열 달 동안 여기에서(배에서) 키운 다음에 처음 만나는 이성, 즉 아들에 대한 느낌이 어떨지 참 궁금하대요. 그리스 비극 같죠. 영화에서 원빈이 아들로 나오잖아요. 봉준호씨랑 많은 얘기를 했어요. 인생 후배? 아무 상관없어요. 봉 감독은 어떻게 보면 늙은이, 노인 같아요. 생각하는 게 굉장하죠.”

 김씨가 꼽은 또 다른 인연은 철학자 김형석(95) 전 연세대 교수다. 김 교수는 1960~70년대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등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그분 아세요. 우리나라 지성이잖아요. 최근 『예수』라는 책을 썼는데, 그걸 읽으면서 참 좋다,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초라하게 태어났던 예수가 오늘 우리에게 보내는 뜻이 자세히 담겨 있죠. 마침 같은 동네(연희동)에 살아요. 감히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 꼭 연극을 보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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