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로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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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지지자들이 9일 NLD의 비공식 선거 결과 발표 후 아웅산 수지의 사진을 휴대전화에 띄우며 환호하고 있다. [양곤 AP=뉴시스]

미얀마 총선 개표가 3분의 1가량 진행된 가운데 아웅산 수지(70)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90% 이상 의석을 석권했다. 10일 AP통신에 따르면 NLD는 미얀마 전체 14개 주 중 4개 주의 상·하원 의석 164석 중 154석(93.9%)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특히 옛 수도이자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하원 45석 중 44석과 상원 12석 전부를 차지했다. 4개 주 상원의원 의석도 NLD가 휩쓸었다. 반면 군부가 이끄는 집권 통합단결발전당(USDP)은 하원 3석 획득에 그쳤다. USDP의 대표 흐테우와 전 대표 슈웨 만도 낙선했다.

외국 배우자 두면 대통령 불가능
내년 대선 겨냥한 개헌론 의식
집권당 지도자 역할에 방점 찍어
야당, 초반 개표 의석 94% 싹쓸이
수지 “NLD, 전체 의석의 75% 확보”

 현재 선출직 상·하원 498석의 33% 개표가 완료된 상황에서 나머지 10개 주의 결과도 비슷할 전망이라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단독 집권을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67% 이상의 선출직 의석을 확보해 53년 만에 군부 독재를 종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지 여사는 10일 영국 BBC와 인터뷰하며 “NLD가 전체 의석의 75%가량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 집계는 이달 중순께 나온다.

 NLD의 압승이 예상되지만 갈 길은 멀다. 군부가 이번 결과에 승복할지도 미지수다. 군부는 1990년 총선에서 NLD가 80% 이상 지지율로 압승하자 부정선거라며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다. NLD가 정권을 잡아도 군부와의 협력은 불가피하다. 미얀마는 군 통수권이 대통령이 아닌 군 최고사령관에게 있다. 내무부 등 3개 부처 장관도 군 최고사령관이 임명한다. 군부의 막후 실세이자 수지 여사의 가택 연금 등을 주도한 탄 슈웨 전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은 퇴임했어도 영향력이 막강하다.

 내년 대통령 선거도 문제다. 미얀마 대통령은 상원, 하원, 군부 의회가 1명씩 부통령 후보를 낸 뒤 상·하원 합동 표결로 3인의 부통령 중 대통령을 뽑는다. 이대로라면 NLD 측 후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작 승리의 주역인 수지 여사는 대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미얀마 헌법에 따라 외국인 배우자를 두었거나 외국 국적 자녀를 둔 경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는 독소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99년 사망한 수지 여사의 남편은 영국인이며 아들 둘도 영국 시민권자다.

 수지 여사가 대선에 나가려면 헌법이 바뀌어야 하지만 군부의 동의 없인 개정이 어렵다. 미얀마에서는 헌법 개정 등에 대해 상·하원 정원의 4분의 3(75%) 이상의 동의를 얻게 돼 있다. 25%의 의석을 우선 가져갈 수 있는 군부가 맘먹으면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단 얘기다. NLD 는 헌법 개정을 시도한 뒤 내년 2~3월 있을 대통령 선거에 수지 여사의 출마가 가능하도록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수지 여사는 10일 BBC와 인터뷰에서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로미오와 줄리엣’ 대사)”이라며 “내가 집권당 지도자로서 모든 사안을 결정하는 데 (대통령이 아니라는 사실이)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헌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수지 여사가 내세울 대통령 후보도 관심이다. 전직 군사령관 출신으로 NLD 창당 멤버인 틴 오(88)가 주목되나 고령이 약점이다. BBC는 “10년간 수지 여사를 보좌했고 수지 여사도 그를 높게 평가한다”고 보도했다. 수지 여사의 최측근인 윈 흐테인(74) NLD 중앙집행위원회 위원도 거론된다. 현지 언론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헌법 개정 전까지 자리를 지키는 임시 대통령이 될 거라고 지적한다. 수지 여사가 집권하면 89년에 군부가 정한 ‘미얀마’ 국호가 야권이 선호하는 ‘버마’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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