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여당 102명 찾은 유승민 상가 … 친박·비박 골 깊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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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10일 오전 8시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선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부친인 고(故) 유수호 전 의원의 발인(發靷)이 있었다.

친박은 ‘물갈이론’ 펼치고
비박 “여기 오래 앉아있어
공천 못 받겠다” 자조도

 8일 낮 12시부터 이날 장지인 경북 영주로 운구차가 떠날 때까지 만 44시간 동안 고인의 빈소는 ‘상가(喪家) 정치’의 현장이었다. 새누리당에선 현역 의원 159명 중 102명이 조문을 다녀갔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와중에도 친박근혜계와 비박근혜계 간의 갈등선은 더 뚜렷해졌다.

 친박계는 장례식장에서 ‘대구·경북(TK) 물갈이론’을 설파했다. “TK에서 20대 총선 공천을 잘해야 한다. 물갈이를 해야 한다”(8일 오후 윤상현 의원), “내가 초선일 때 대구 의원 7명이 물갈이되면서 다른 지역이 살아났다”(9일 오후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주장이 나왔다. 조 원내수석부대표는 “대구에서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구에서 택시 3~4번만 타보면 알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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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부친인 고(故) 유수호 전 의원의 발인식이 10일 대구 경북대 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유 의원이 영정을 뒤따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물갈이 대상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유 전 원내대표, 그와 가까운 의원들을 가리키는 것이란 소문이 지역엔 파다하다. 그런 물갈이론을 일부 친박계는 유 전 원내대표 상가에서 펼쳤다.

 상가는 역설적 공간이었다. 대구에 상륙하려는 친박계 후보들이 빈소를 찾았다. 특히 유 전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대구 동을에 도전장을 낸 이재만 전 동구청장이 조문객과 기자들에게 “제가 이재만 전 동구청장입니다”고 자신을 홍보했다. 유 전 원내대표의 측근인 김희국 의원 지역구(대구 중-남)를 노리는 이인선 전 경북 경제·정무부지사도 8일 주로 현역 의원들이 있는 테이블을 돌며 눈도장을 찍었다.

 유 전 원내대표와 가까운 ‘친유’ 의원들은 개근하며 빈소를 지켰다. 유승민 원내대표 시절 함께 손발을 맞췄던 김세연·김희국·이종훈·민현주 의원 등이 그랬다. 이들이 이틀 연속 빈소를 찾아 유 전 원내대표의 곁을 지키자 조문객들은 “안 그래도 청와대와 친박계의 눈 밖에 났을 텐데 저 사람들 괜찮을까”라고 수군거렸다. 한 중진 의원은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큰일이다. 여기에 오래 앉아 있어서 공천을 못 받게 됐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빈소에선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사의 표명도 화제였다. 정 장관은 유 전 원내대표와 경북고(57회) 동기동창이다.

 유 전 원내대표의 경북고 동기생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선 “친구 아버지 빈소에 침을 뱉은 것 아니냐”는 격한 말도 나왔다. 정 장관의 사의 표명 이후 TK 물갈이론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비박계인 박민식 의원이 10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상주가 천붕(天崩·부모가 돌아가신 슬픔을 하늘이 무너지는 것에 빗댄 말)을 겪는 빈소에서 상주에게 매질을 하느냐”며 ‘물갈이론’을 주장한 친박계 의원들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청와대 인사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가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 유 전 원내대표와 인연이 있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신동철 정무비서관 등은 조문객 명단에 없었다. 이 실장은 조화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유 전 원내대표는 장례식 막바지인 지난 9일 저녁 기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다 “우리 아부지(아버지)가 이병기 실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청와대 의전수석 할 때부터 참 마이(많이) 아끼셨는데…”라고 서운함의 일단을 드러냈다.

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person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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