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취재일기

야당 무섭다고 사무실 불까지 끄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남윤서 기자 중앙일보
기사 이미지

남윤서
사회부문 기자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숭동 국립국제교육원 내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회관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3층짜리 건물의 창문은 하나도 빠짐없이 블라인드 커튼으로 가려졌다. 경찰 80여 명이 건물 주변을 에워쌌다.

 교육부 소속 태스크포스(TF)팀이 이곳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TF의 존재는 25일 오후 8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이 ‘국정화 비밀 TF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현장을 찾아가면서 알려졌다. TF 직원들은 국회의원들이 찾아오자 문을 걸어 잠갔다. 곧이어 경찰 병력이 출동했고 야당 의원들은 번갈아 문 앞을 지키며 밤을 새웠다. 대치 상황은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야당 의원들에 따르면 건물 안에는 일부 TF 관계자들이 남아 있었다.

 김태년·유은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야당 의원 7명은 건물 앞에서 “비밀 조직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히라”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뒤이어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회원 50여 명이 “역사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집회를 열고 야당 의원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확성기를 타고 고성이 울리는 시끌벅적한 상황에서도 건물 안은 고요했다.

기사 이미지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전날 오후 교육부 관계자들은 야당 의원들이 동숭동 사무실을 덮쳤을 때도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 당장은 사실을 확인해 주기 어렵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국정화 관련 업무가 늘어나면서 인력을 보강해 이달 5일부터 TF를 운영했다”고 간략히 해명했다. 아무리 야당 의원들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업무를 한다면서 사무실 불을 끄고 창문을 가리는 것까지 이해할 순 없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지난 12일 확정 발표되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진행돼 왔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국정화는) 결정된 바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실무자들은 일찌감치 국정화를 할 경우와 안 할 경우 시나리오별로 준비를 마치고 위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이미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정부 방침으로 발표됐고 각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집행한다는 TF가 야당 의원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숨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가 불을 끄고 문을 잠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행동은 국정화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불신만 부채질할 게 분명해 보인다.

 교육부는 행정예고 기간인 다음달 2일까지 국정화에 관한 국민 의견을 받는다고 한다. 행정예고 공고문에 나와 있는 소관 부서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봤다. 통화연결음만 반복해서 울렸다.

남윤서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