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행복을 전하는 ‘백발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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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한 프루스트 의자 옆에 선 알레산드로 멘디니. “좋은 디자인이란 시와 같고, 미소와 로맨스를 건네주는 것”이라며 쓸모가 디자인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줬다. [사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우리는 모두 배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배가 쓰러지지 않는 한 인생은 계속 앞으로 가죠. 운이 좋았지만, 지금 하는 일들이 내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작은 키에 동그란 눈을 한 ‘백발 소년’에게 팔순이 넘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는 비결을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84)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600여 점 규모의 회고전 ‘디자인으로 쓴 시(詩)’를 연다. 디자이너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무렵인 1983년의 초기작부터 지난 4월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 선보인 신작까지 드로잉과 메모, 생활용품·가구, 건축물 모형 등을 망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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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멘디니는 스물여덟 살에 밀라노 폴리테크니코 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건축·디자인 전문지 ‘카사벨라’ ‘모도’ ‘도무스’ 편집장으로 일했다. 58세 되던 89년 건축가인 동생 프란체스코와 함께 밀라노에 ‘아틀리에 멘디니’를 열었다. 카르티에·에르메스·스와로브스키·알레시 등과 협업했다.

‘디자인으로 쓴 시’ 멘디니展

 발레리나가 회전하듯 소녀가 양팔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코르크를 들어 올리는 와인 오프너 ‘안나G’(1994)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대표작이다. 골동품 의자를 사다가 색점을 찍어 내놓은 ‘프루스트 의자’(1978)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프루스트 의자는 한국의 청자·조각보와도 만나며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독일식 ‘굿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기능주의에 반발, 아름다움과 인간미를 살린 디자인으로 리디자인의 시대를 열었다. 리디자인이란 기존 제품의 기능·재료·형태 등을 개량하거나 변화시키는 걸 말한다. 그는 “좋은 디자인에는 호감과 친절함, 유토피아 정신이 있어야 한다”며 “세상은 험악하며, 사람들은 힘들게 살고 있다. 행복하지 않으며, 너무 많은 기술에 갇혀 있다. 내 작품이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고 따뜻함을 불어넣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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