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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하는 40대 중학교사, “문제아 다시 보게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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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장면1: 4년 전 어렵사리 대기업에 취직했다. 송민호(32·경기도 성남시)씨의 기쁨은 잠시였다. 강도 높은 업무와 스트레스, 풀 길이 없었다. 친구들의 위로도 잠시였다. “휴직과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탈출구는 뜻밖에도 ‘고전(古典)’이었다. 지난해 ‘2030 고전 모임’에 들어갔다. 매주 『논어』와 『맹자』 등을 공부했다. 그러다 한나라 고시(古詩)에서 ‘인생불만백 상회천세우(人生不滿百 常懷千歲憂·인생은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데, 항상 천년의 근심을 품는다)’란 구절을 접했을 때 가슴이 뻥 뚫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유가 되더라. 고전을 읽고 토론하면서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 장면2: “아이들이 왜 말을 안 듣지?” 중학교 국어 교사인 이행민(44·광주광역시)씨는 삶이 힘겨웠다. “아무리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지시하고 야단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 생활은 공허했고 삶의 의미도 없었다. 고민 끝에 동료 교사들과 철학서적을 탐독했다. 철학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다가 “폭력의 최소화, 자유의 최대화”라는 말을 듣고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철학은 한 가지 사안도 여러 시각으로 보더라. 거기서 많이 배웠다.” 예전에는 문제투성이 학생을 그저 ‘문제아’로만 봤다. ‘왜 그럴까’를 묻지 않았다. “철학을 접한 후에는 ‘그 이유’를 찾게 되더라. 어떤 환경과 사정이 있었기에 저러는 걸까.” 그 뒤부터 제자들과의 관계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는 “이제 학교 생활이 너무 즐겁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광복 후 70년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바퀴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거기에 자기 삶을 돌아보는 인문학적 성찰이 낄 틈은 없었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는 “가끔 CEO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을 한다. 남들이 보기에 모든 걸 이룬 사람들이다. 그런데 막상 강연장을 가면 그분들에게서 ‘삶의 허(虛)함’이 느껴진다. 그걸 채우기 위해 이곳에 왔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인문학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호사(豪奢·호화로운 사치)’ 정도로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인문학의 대중화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강연 인문학’이 주를 이룬다. 유명 강사의 강연을 쇼핑센터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문학 수요자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모습이다. ‘생활 인문학’으로의 진화가 앞으로의 과제로 제기된다. 전남대 장복동(철학과) 교수는 “여기저기서 자발적인 인문학 커뮤니티가 생겨나야 한다. 또 참여자가 발제자가 되는 자기 주도적 인문학이 활성화돼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삶의 질은 ‘진정한 3만 달러 시대’의 필요조건이다. 북유럽에서는 일상 속 인문학이 삶의 빈 틈을 채우고 있다. 스웨덴은 전체 인구의 60%가 자발적으로 인문학 동아리에 참여할 정도다. 26년간 스웨덴에서 살았던 황선준 경남교육연구정보원장은 “동네 이웃들, 직장 동료와 함께 책을 돌려보고 토론하는 문화가 스웨덴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문화가 꾸려져 있다. 인문학이 생활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 수 있는 배경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힘이다. 그 힘은 삶의 질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인문 코드는 한식에도 적용된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5년 전 사찰음식 세계화 행사가 열렸다. 한국의 온갖 사찰음식이 성대하게 차려졌다. 불교 조계종은 맛과 모양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음식을 먹어 본 뉴요커들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는 음식에 담긴 스토리를 기대했다. 한국의 역사와 자연, 그 속에 담긴 철학을 먹고 싶었다”며 오히려 아쉬워했다. 그날 음식에 ‘인문 해설’이란 요리재료가 빠진 셈이었다. 한식의 맛과 모양 못지않게 거기에 담겨 있는 ‘우리의 철학’도 중요한 음미 포인트였다.

 인문 정신은 한류, 디자인, 전통문화유산, 패션 등과 결합할 때 더 큰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한양대 박기수(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그동안 한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한정돼 있었다. 한류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한류가 문화 전반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보편적 인문정신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 ‘지속 가능한 한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인문학은 삶의 향기다. 3만 달러 시대는 인문의 향기가 일상으로 스며든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니라 ‘군계다학(群鷄多鶴)’의 시대라고도 부를 수 있다. 방송통신대 유범상(행정학과) 교수는 “인문학 바람이 일회성 교양에 머물러선 곤란하다. 이제는 ‘생활 인문학’을 통해 누구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누구나 ‘개인 인문학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성호·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취재 도움 주신 분·기관=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북유럽문화원,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표정훈 한양대 특임교수,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김남연 강원대 불문학과 교수, 박연규 경기대 교양학부 교수,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박용준 인디고서원 대표, 이상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 김나나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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