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야성에서 얻은 위안 … 슬픔도 길들여지는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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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책] ‘대결보다 공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 하는 ‘이달의 책’에서는 공존을 주제로 한 책 세 권을 골랐습니다. 낯선 동물 참매와 소통하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한 여교수의 이야기, 12세부터 87세까지 자신의 몸과 매일 대화하며 그 변화를 기록한 소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경쟁 대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람이 선선해지는 계절, 함께 하는 삶을 고민해보시길 권합니다.

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판미동
456쪽, 1만5000원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메이블(Mabel)이라고 이름 붙인 참매(hawk) 길들이기를 통해 극복해낸 과정을 회고한 논픽션이다. 저자이자 주인공인 헬렌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과 과학사를 가르치는 독신 여교수. 런던에서 사진 기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졸지에 세상을 떠나자, 상대 남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연애를 망칠 만큼 심신이 망가져 버린다. 헬렌은 덥석 어린 참매 한 마리를 사들여 조련에 나선다. 동성애자이자 사회부적응자였던 20세기 초반의 소설가 T H 화이트가 쓴 조련서 『참매』를 참고하면서다.

 사실상 독학으로 감행한 참매 길들이기가 순탄할 리 없다. 설상가상, 화이트의 『참매』는 조련의 ABC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매를 훈련시키는 지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서술한 목록”이라는 평가를 받은, 일종의 실패담이다.

 헬렌은 화이트의 조련서와 자신의 체험을 번갈아 오가며 참매 조련의 어려움과 기쁨, 동물의 야성을 순치시키는 일의 한계와 의미, 참매 조련의 문화사적 의미 등 이야기의 볼륨을 한껏 키운다. 지극히 어려웠지만 결국 이겨냈다, 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아니다.

『메이블 이야기』의 저자 맥도널드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그가 길들인 참매 메이블. [사진 판미동]

 화이트는 불행한 유년을 보낸 이였다. 그의 부모는 지독하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개들을 아껴하자 아버지가 총으로 모조리 쏴 죽였을 정도다. 상처가 깊었던 화이트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해 케임브리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지만 끝내 ‘뒤틀린’ 성적 취향을 억누르지 못한다. 소녀는 괜찮지만 성인 여성의 몸매를 불쾌해 한다.

 그에게 참매는 본성과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참매 길들이기에 나섰지만 어느 정도 참매의 본성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조련 과정이 결국 조련 실패를 부르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헬렌은 화이트의 실패를 따라가며 자신의 조련 속도와 방향의 옳고 그름을 가늠한다.

 참매는 몸 길이가 38∼48㎝ 정도로 비슷한 종류인 새매·송골매보다 크다. 살생을 좋아하고 길들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성미가 시무룩하다고 한다. 풍부한 관련 자료, 깔끔한 문장력으로 무장한 헬렌은 참매를 ‘깃털 달린 재킷을 입은 850g짜리 죽음’으로 표현한다. 참매를 길들이는 매잡이의 운명이 결국 잔혹한 사냥 과정을 통해 죽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구절이다. 매가 길들이는 사람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훈련시키는 과정인 ‘와칭(Watching)’, 매의 살상 욕구가 들끓는 상태를 뜻하는 ‘야락(Yarak)’ 등 전문적인 길들이기 과정에 대한 묘사도 흥미를 자아낸다.

 사실 매잡이 전통은 영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소설가 이청준이 중편 ‘매잡이’에서 우리의 매잡이 풍습을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야성을 길들여 거친 자연을 제압하는 매잡이는 투박해서 매력적이다.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회고담이다보니 아무래도 이야기가 강렬하지는 않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저자 헬렌의 단정한 문장들을 곱씹어 읽기를 권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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