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아버지 치매 … 새엄마·아들 ‘내가 법적 대리인’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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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초반인 A씨는 평생 모은 100억원대 재산의 대부분을 최근 1년 사이에 잃었다. 지난해 1월 60대 초반의 여성 B씨와 결혼한 A씨는 자신의 회사가 있는 미국으로 부부가 함께 건너가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B씨는 A씨의 펀드 등을 현금화해 자기 계좌로 송금했다. 국내로 돌아온 두 사람은 A씨 명의로 된 토지도 팔기 시작했다. 서울 강북의 땅을 팔고 받은 대금 46억원 중 26억원을 B씨가 가져갔다. B씨의 은행 송금이나 국내 부동산 처분은 모두 A씨를 대동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길지 않았다. A씨와 B씨는 혼인신고 9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이혼했다.

 A씨 자녀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아버지의 재산 탕진과 이혼에 아연실색했다. A씨의 장남은 뒤늦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아버지가 2013년 뇌 수술로 경미한 치매 증상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질 줄은 몰랐다. 사기에 당한 것 같다”며 법률 상담을 했다. 그는 서울가정법원에 아버지와 B씨의 혼인을 무효로 하는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B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대해 B씨는 “혼인 기간 중 A씨의 동의하에 재산을 처분한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A씨 장남은 나머지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치매 확정 판정을 받은 아버지에 대한 성년후견인 신청을 법원에 냈다.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재산 관리나 치료·요양 등을 도와주는 성년후견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성년후견 제도는 2013년 7월 민법 개정으로 기존의 한정치산·금치산 제도가 폐지되면서 도입됐다. 18일 대법원에 따르면 시행 후 지난 7월 말까지 전국 가정법원에 접수된 성년후견 신청은 4800여 건으로, 이 중 2686건에 대해 성년후견인이 선임됐다. 성년후견인은 2013년 7~12월 562명에서 2014년 1646명으로 늘었다. 올 들어선 지난달까지 478명이 선임됐다.

 성년후견은 장애인·중증 정신질환자·고령자 등을 대상으로 하지만 치매 노인에 대한 후견인 신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가정법원 관계자는 “노인성 질환의 경우 증상이 급속히 악화되고 미리 대비를 해놓지 않으면 재산관리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자녀들의 후견인 신청이 많다”고 전했다.

 특히 70~80대 자산가의 경우 성년후견을 둘러싼 분쟁이 크게 늘고 있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가운데 가족 간 유대관계가 약화되고 재산 상속 등을 미루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가족들 사이에 ‘성년후견인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70대 중반의 중견 건설업체 사장 C씨는 10년 가까이 사귀어온 50대 여성 D씨와 2013년 혼인신고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 진단을 받았다. C씨 차남은 지난해 아버지의 혼인을 무효로 해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다. D씨는 “내가 성년후견인으로 지정될 경우 회사 경영권까지 넘어갈 수 있다고 보고 소송을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C씨 차남과 D씨, 그리고 C씨 장남이 서로 자신을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은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변호사를 C씨 후견인으로 선임한 것이다.

 남편과 사별한 뒤 아파트 한 채와 10억원대의 금융자산을 갖고 있는 70대 후반 여성 E씨의 경우 50대 아들과 딸이 성년후견인을 놓고 다툼을 벌인 사례다. 올 들어 E씨의 말이 어눌해지자 딸이 E씨 몰래 법원에 후견인 신청을 한 뒤 E씨 계좌에서 6억원을 인출해 자기 계좌로 이체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E씨 아들이 여동생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법원은 E씨의 의사를 물어본 뒤 아들을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임채웅(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최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치매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실제 중견기업 일가 중에선 사주의 자녀 등이 성년후견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가족 간 분쟁으로 번지기 전에 당사자가 미리 후견인을 지정하는 임의후견 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성년후견제도=질병·장애·노령 등의 사유로 본인 스스로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법원에서 의사 결정을 대신해 주는 대리인을 선정하는 제도. 대상자의 판단 능력에 따라 한정후견·특별후견·임의후견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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