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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 우습게 만드는 '트럼프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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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UCSD) 석좌교수

가장 중요한 지표들을 살펴보면 2016년 미국 대선의 본선에서 맞붙을 후보는 젭 부시와 힐러리 클린턴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볼 수 있다. 대선전 초반의 지지율 조사 결과가 항상 정확하지는 않다. 유력 인사들의 지지도, 확보한 자금, 정치 예측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은 모두 부시와 힐러리를 최종 후보로 지목하게 만든다. 하지만 대선 초반 레이스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동산 거물 도널드 트럼프가 급부상한 것이다. 트럼프는 아마 틀림없이 사라질 운명이지만 그의 등장은 미국 민주주의의 상태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투영하고 있다.

 트럼프가 누리고 있는 악명은 돈, 개인적인 매력, 매체 노출의 복합적인 산물이다.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라는 리얼리티 TV 쇼의 진행자인 트럼프는 참가자들을 “당신은 해고됐어”라는 퉁명스러운 말로 탈락시킨다.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기 전 트럼프는 ‘버서(birthers)’라고 불리는 비주류 그룹을 후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룹이다. 그가 정치적 인기몰이를 시작한 계기는 불법 이민에 대한 강경 발언이다. 트럼프는 멕시코가 미국에 ‘살인범과 강간범’을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특정한 정책 노선 덕분에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입장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그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직설적이고 ‘색깔 있는’ 표현으로 정치인들에게 날 선 비판을 날리기 때문이다. 그는 전형적인 반(反)워싱턴 후보다.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은 오바마 시대의 암울한 특징이다. 트럼프는 선출 공직자들을 “멍청하다”고 부르며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한다. 심지어 자신이 정치인들을 매수했다고 자랑하며 자신은 돈이 많기 때문에 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그의 냉소주의는 충격적이다.

 트럼프의 외교 정책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자신이 강인하다는 것과 협상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국가(IS)도 자신 같으면 단번에 궤멸시킨다고 호언한다. 자신의 비즈니스 감각을 근거로 이란과 중국, 무역과 이민 분야에서 더 나은 협상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에게는 구체적인 외교정책이 하나도 없다는 게 확실하다. 그의 인기는 대부분 반이민 정서에 기댄 것이다.

 미국 대통령 예비 선거 기간에는 신문에 시답잖은 기사가 잔뜩 실린다. 당의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들이 난립했다가 퇴장하는데 신문이 그들을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특정 사안에 대해 헌신적인 유권자 그룹들을 대변한다. 이번에도 ‘틈새’ 후보들이 나왔다. 공화당 진영의 경우 이들은 각기 종교성이 짙은 사회적 보수주의자(크루즈와 허커비), 자유지상주의자(폴), 교사들을 강경하게 다뤄야 한다는 주지사들(크리스티), 공공 부문 근로자(워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화당 주류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공화당은 수가 늘고 있는 히스패닉계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멕시코인에 대한 트럼프의 발언은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그의 여성 폄하 발언도 문제다. 여성 또한 공화당이 열세인 유권자층이다. 지난 여러 차례 대선에서 여성 유권자들은 점점 많은 수가 민주당을 찍고 있다.

 트럼프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면 공화당은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되기 위해 젭 부시는 자신이 예비 경선이 아니라 본선에서 싸우고 있는 듯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부시는 공화당 내 우파의 구미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교육이나 이민같이 까다로운 사안에 대해서도 보다 많은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부시는 자금 면에서 엄청나게 유리하다. 지금까지 1억 달러 이상 모금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그의 입장은 공화당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화당 유권자들의 보수성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리스마 부족도 문제다. 대중 앞에 선 그의 모습은 따분하고 생명력이 없다. ‘이라크 침공은 현명했는가’와 같은 간단한 질문에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공화당 우파의 후보들이 앞다투어 트럼프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극단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문제다.

 결국 트럼프는 낙마할 것이다. 그는 계속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후보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정치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슬프게도 공화당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트럼프가 받고 있는 지지의 대부분은 공화당 내 우파의 ‘분노의 정치’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정치와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희망 섞인 전망을 하자면 공화당은 결국 시민적 토론을 복원하고 진지한 정책 대안을 제시할 후보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아직은 멀어 보인다.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UCSD)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