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비 맞는 백발 감독, 어느 선수가 안 따르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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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슈틸리케 감독은 폭우가 쏟아져도 비를 맞으며 서서 선수들을 독려한다. 혼신을 다한 지휘로 선수들의 투쟁심을 높인다. 지난 1월 26일 아시안컵 준결승전 당시 비에 흠뻑 젖은 슈틸리케 감독. [시드니 AP=뉴시스]
유대우 대표팀 단장

“슈틸리케 감독이 지휘관으로 전쟁을 이끈다면 부하들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다.”

 유대우(63) 2015 동아시안컵 대표팀 단장(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대회 우승을 이끈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을 이렇게 평가했다.

 육군 사단장(소장) 출신 유 단장은 지난 1월 호주 아시안컵에 이어 중국 우한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단장을 맡았다. 슈틸리케를 가까이서 지켜본 유 단장은 10일 “군대 지휘관으로 본다면 지장(智將)·용장(勇將)·덕장(德將)의 모습을 골고루 갖췄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동아시안컵에서 중국(2-0승)과 일본(1-1무), 북한(0-0무)을 상대로 1승2무를 거뒀다. 찜통더위 속에서 일주일간 세 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고려해 1·3차전에만 정예 멤버를 기용했다. ‘일본에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국민 정서에도 불구하고 한·일전에 주전 9명을 뺐다. 결국 결과로 자신이 지혜로웠음을 증명했다.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휴식일 선수들은 쉬게 하고 자신은 숙소에 틀어박혀 비디오 분석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경기를 치른 뒤 슈틸리케 감독의 와이셔츠는 늘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유 단장은 “감독님은 경기 중 비가 쏟아져도 우의를 입지 않는다. 선수들과 똑같이 비를 맞으며 함께 뛴다. 아시안컵 때 비를 너무 맞아서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며 “일본 감독(할릴호지치)은 비를 피해 벤치 안에만 앉아있더라”고 말했다. 이어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 전 선수들에게 ‘유니폼에 새겨진 호랑이 마크(축구 대표팀 엠블럼)는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호랑이처럼 상대를 제압하고 포효하자’며 선수들 투쟁심을 끌어올렸다”며 “1954년생인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팀이 지도자로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혼신을 다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10일 동아시안컵 우승 메달을 걸고 귀국한 남자 축구 국가대표 선수단. [인천공항=뉴시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9일 동아시안컵 마지막 경기인 중국-일본전 하프타임 때 선수단 마지막 미팅을 제안했다. 중국이 일본에 비기거나 져야 한국이 우승할 수 있는 상황. 그는 선수들에게 “우리가 우승할지, 준우승할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건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줬다는 점이다. 난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여러분이 잘해줘 K리그가 잘 되는 게 내 목표다”고 말했다.

 유 단장은 “무뚝뚝한 독일 할아버지 같지만 다정다감하다. 선수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지도자”라고 슈틸리케의 스타일을 설명했다. 동아시안컵 도중 부상으로 낙마한 여자 대표팀 심서연(26·이천대교)까지 챙겼을 정도다. 유 단장은 “슈틸리케 감독이 심서연에게 위로의 화환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단 자신의 이름은 빼고 ‘남자 선수단 일동’으로 해 달라고 당부했다”며 “군대에서 지휘관이 진심을 보여주면, 병사들도 진심으로 화답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을 잘 어루만져 준다”고 말했다.

 외국 기자들도 슈틸리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영국 출신 베테랑 축구해설가 존 헬름(73)은 “슈틸리케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감독”이라며 “중국을 상대로 단 하나의 문제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교체 타이밍 등을 보면서 팀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중국 국영방송 CCTV의 왕난 기자는 “슈틸리케는 국내파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절박함을 이끌어냈다. 국내파들은 유럽파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다”고 평가했다. 중국 LETV의 첸이통 기자는 “한국 감독은 경기장에 입장하는 선수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더라. 선수들과 스킨십을 통해 믿음을 심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 부임 후 A매치 12승3무3패를 기록 중이다. 세계적인 강호와 제대로 맞붙지는 않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을 앞두고 골 결정력 부족, 유럽파와 국내파 조화 등 과제도 남아 있다. 10일 귀국한 슈틸리케 감독은 “동아시안컵 우승을 통해 팀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면서도 “슈팅 과정에서 마지막 순간 냉정해져야 한다. 기술적인 면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한=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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