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이 만난 사람] 정치개혁 총대 멘 이병석 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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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위원장은 2005년 ‘헌법을 연구하는 국회의원 모임’을 주도, 개헌 공론화를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헌법적 가치를 확장하고 국민들의 기본권을 확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개헌 논의의 시기를 늦출수록 국민에게 손해가 된다”고 했다. [조문규 기자]

국회가 내년 4월 치러지는 20대 총선의 선거 룰을 고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헌법재판소가 현행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 편차(3대 1)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선거구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여기에 새누리당이 후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며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들고 나왔다. 미국식 예비경선제를 본뜬 오픈 프라이머리는 여야가 같은 날 동시에 후보 경선을 실시하고 유권자들(비당원 포함)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뽑도록 하는 경선 방식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전국을 5~6개 권역으로 나눈 뒤 각 당이 권역별로 비례대표 후보를 내고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나누는 제도다.

 협상 채널은 국회 정치개혁특위다. 활동시한(8월 31일)을 한 달가량 남겨놓고 있지만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픈 프라이머리는 야당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여당이 반대하고 있어서다. 꼬인 실타래를 풀 묘수 찾기에 골몰하고 있는 이병석(새누리당·4선·포항북) 위원장을 지난달 29일 만났다. 이 위원장은 “오픈 프라이머리도 안 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어렵다고 하면 과연 국민이 정치개혁을 했다고 평가해줄 수 있겠는가”라며 여야에 ‘트레이드 딜’을 제안했다. 그는 “두 제도를 맞트레이드해 새로운 제도로 내년 총선이 이뤄진다면 대한민국 정치에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이 될 것”이라며 “각 당 최고지도자들이 국민의 열망과 눈높이에 맞게 결단하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에서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 의원 정수(300명)를 한 석도 늘릴 수 없다, 증원은 불가피하다는 정수 논란에 갇혀 개혁 이슈들이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표의 등가성 원칙을 지키라는 헌재 판결을 받아들인다면 현행 지역구(246석)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현재 54명인 비례대표 숫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고 야당은 늘리자는 의견(의원 정수 369명)이다. 여야가 대척점에 있다. 300석에서 한 석도 손 못 댄다고 하면 협상의 여지가 없다. 너무 많은 의석은 아니라도 일부 어쩔 수 없는 미세한 정원 조정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개혁 이슈는 뭔가.

 “인구 편차를 2대 1 이내로 하라는 헌재 결정을 수용한 선거구 획정이다. 국회 밖 제3의 독립기구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선거구를 획정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선거구획정위가 확정한 안을 특위가 수정하지 못하도록 이미 법제화했다. 선거구 획정 하나만은 국민이 보기에 특정 계파나 정당, 국회의원이 개인 이익을 위해 게리멘더링 하지 못하게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 여야의 선거구 획정 기준안을 보면 모두 지역구 의석이 늘게 돼 있다. 지역구 의원들의 기득권 지키기 아닌가.

 “어느 쪽으로 가든 지역구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구 편차 2대 1로 재획정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젠 땅이 아니고 사람이 중심이 된다는 의미다. 앞으론 인구가 느는 곳은 자동으로 선거구가 늘고 인구가 주는 곳은 자동으로 선거구가 줄어들게 된다.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 권역별 비례대표나 오픈 프라이머리는 손도 못 대고 선거구 획정만 끝내게 된다면 정치개혁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까.

 “선거구 획정은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나머지가 다 무산된다면 국민은 이번 정개특위가 제대로 활동했는가 의심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여야가 대척점에서 합의되지 않은 개혁 이슈를 정개특위에서 의결할 순 없다. 그래서 여야 지도자들에게 국민이 원하는 정치개혁의 눈높이에 맞춰 결단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요청하고 있다. 권역별 비례대표, 오픈 프라이머리 논의는 지금까지 실행해보지 않은 새로운 실험이다. 우리나라 정치발전과 혁신을 위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대한민국 정치 미래 100년 대계를 위한 새로운 주춧돌을 놓는 일이 될 것이다.”

 - 새누리당은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에 반대한다. 위원장의 견해는 뭔가.

 “개인적으론 도입해볼 만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지역대결주의를 완화시키고 사표(死票)를 방지해 궁극적으로 양당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제3당 출현을 통해 다당제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국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제도적으로 이행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이젠 공천권도 밀실에서 특정 계파나 그룹이 독과점적으로 자의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 당원과 국민의 생각이 공천에 반영돼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가 동시에 오픈 프라이머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제도를 맞트레이드하는 쪽으로 논의해 바뀐 제도로 내년 총선이 이뤄진다면 대한민국 정치 혁신에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론 여야가 두 제도를 동시에 수용해 대한민국 정치 제도 개혁의 큰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 두 제도가 도입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

 “두 제도가 동시에 들어올 경우 지역주의, 극단적 대결 정치는 완화되고 녹색당·환경당같이 가치대표 정당이 출현할 수 있게 된다. 현재의 양당 체제가 갖고 있는 대의정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제3당 출현으로 다양한 국민욕구를 수렴할 수 있게 된다. 정치의 백년대계를 새로 짜는 혁명적인 일이다. 일정 단계가 되면 정개특위 내 여야 간사들과 특위 위원들이 대한민국 정치의 백년대계를 위해 선택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와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될 거다.”

 - 오픈 프라이머리는 결국 현역들에게 유리한 제도 아닌가.

 “기존 정치인에게 유리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특정 계파나 보스가 객관적 평가 없이 인위적으로 공천 학살이란 이름으로 정적을 뿌리뽑는 데 악용돼온 공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혁신한다는 데 의미가 크다. 물론 정치 신인이나 여성들에게 불리한 진입장벽을 어떻게 낮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 조직 동원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어차피 실험이다. 실험해야 될 제도에 대해 모든 걸 어렵다고 생각하고 장단점을 따진다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여러 가지를 감안해 보정책을 만든다는 전제로 큰 틀의 정치개혁을 열어 나가고 국민 참여의 장을 열어줘 실질적인 대의제를 보장해야 한다.”

 - 여야 간 타협이 이뤄질까.

 “바로 이럴 때 여야의 핵심 지도자들이 결단해 국민의 열망과 눈높이에 부응해야 한다. 여야 간 대척점에 있는 두 제도를 맞트레이드해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가오는 대선에서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 유력 주자들이 나서야 한다는 얘긴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박근혜 대통령 집권까지는 3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박정희 대통령가(家)의 정치로 흘러왔다. 그러나 201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의 틀이 바뀐다. 정치 지평과 생태계가 달라지게 된다. 실험적 정치개혁의 제도 도입을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또 하나의 정치 공백이 이어져 과도기적 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차기 주자들이) 다가올 정치지형을 염두에 두고 실험적 제도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한 시대를 준비한다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소선거구제·양당제를 근간으로 한 1987년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다. 그러나 중·대선거구제 도입, 개헌 논의 등 정치의 틀을 바꾸는 근본적 이슈들은 이번 논의에서 빠졌다.

 “선거구제 변경은 그 자체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다. 오픈 프라이머리,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같은 정치개혁 시스템이 좋은 방법으로 만들어져 진전이 되면 그 다음 단계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한 단계 진전된 논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헌법 개헌 문제로 이어져 그랜드 디자인을 완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민주주의의 발전, 국민의 기본권 확장, 통일 같은 거대 담론을 해결하려면 결국 개헌 논의로 가지 않을 수 없다.”

 - ‘개헌 논의는 국정의 블랙홀’이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국회 개헌 논의는 사실상 중단됐다.

 “개헌 논의가 국정의 블랙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개헌은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권력을 극대화시키고 성공적인 대통령의 치적을 만들어내는 가장 무섭지만 소중한 옵션일 수 있다. 대통령이 갖고 있는 가장 실질적인 카드를 왜 처음부터 포기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권력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대통령은 여러 카드와 옵션을 갖고 있어야 한다. 특히 임기 후반을 넘어가면 더 그렇다. 지금 개헌 하자는 게 아니다. 헌법적 가치를 보다 확장하기 위해 지금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S BOX] “대통령의 권력은 일방적 지시 아닌 설득력에서 나와”

19대 국회 전반기(2012~2014년) 국회 부의장을 지낸 이병석 위원장은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참모(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이다. 고향(경북 포항)과 학교(동지고·고려대)가 같은 MB(이명박 전 대통령)와도 친분이 깊다. 고려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 위원장은 ‘대통령학’에 특히 관심이 많다. 지난해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역대 대통령의 멘토로 이름을 날린 리처드 E 뉴스타트의 명저 『대통령의 권력』(다빈치)을 번역 출간했다.

 이 위원장은 “이 책은 루스벨트 에서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자세히 분석해 대통령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권력 행사의 방식은 어때야 하는지를 정리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뉴스타트에 따르면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력에서 나온다. 따라서 명령에 의한 영향력 행사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위원장은 “대통령의 권력 행사는 정치적 상관관계에 있는 액터를 설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1차 설득 대상으로 백악관 참모를 꼽고 있는 게 흥미롭다”고 말했다. 책을 번역하게 된 배경에 대해선 “대통령이 자신이 생각하는 국정지표나 철학을 일방적으로 지시한다고 해서 백악관 참모들이 무조건 따라가는 게 아니다. 1차적으로 백악관의 자기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의회, 그중에서도 야당을 설득하는 데 임기의 상당 시간을 써야 한다. 세 번째 설득 대상은 언론이다.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과 권력 행사 방식을 보면서 우리나라 대통령들도 귀중한 경험을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jmlee@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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