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국인 강제노역 사실상 첫 공개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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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환경 하에서 ‘강제로 노동한(forced to work)’ 사실이 있음을 인식하며….”

5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본에서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세게문화유산 등재심사 회의가 열렸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21개 위원국이 강제징용 시설을 포함한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합의 결정한 뒤 일본 측 수석대표인 이즈미 히로토(和泉洋人) 총리특별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강제징용이 있었다고 국제사회에서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해당 시설에 정보센터 등을 세워 희생자들을 기리겠다”고도 했다. 일본 정부를 대표한 그의 발언은 WHC 등재권고문에 주석으로 담겼다. 또 ‘위원회는 일본의 의견을 주목한다’고 명시했다.

뒤이어 한국측 수석대표인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은 “일본의 발언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일본이 향후 조치를 성실히 이행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사실을 밝히고, 한국 정부는 등재에 찬성하는 발언을 한다는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유산군'이란 제목으로 신청한 근대산업유산 23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ㆍ일 두 나라의 갈등도 마침표를 찍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등재 결정 직후 서울 외교부 청사 브리핑에서 “한국측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히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외교부 고위관계자는 “사실상 최초로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에 강제 노역을 공식 인정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권고문에 포함시키기 위해 한ㆍ일은 회의 직전까지 치열한 외교 교섭을 벌였다. 당초 4일로 예정됐던 위원회가 하루 연기된 것도 강제징용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ㆍ야마구치(山口) 지역의 23개 근대산업시설 가운데 7개 시설에서 5만 7900명이 강제징용된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끝까지 ‘강제징용(enforced labor)’라는 단어와 노역을 시킨 주체가 표현되는 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결국 ‘의사에 반해 동원’, ‘강제로 노동’ 등으로 풀어쓰자는 것으로 양쪽이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이 표현들을 모두 합하면 ‘국제법상 강제징용’으로 인정된다고 판단한 결과라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당초 목표는 7개 시설을 유산 등재에서 제외시키는 것이었지만 일본이 강제징용을 인정하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높임으로써 얻는 성과가 더 컸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은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되자 속보를 내고 환영했다. NHK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가 열린 독일 본의 회의장과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 기타큐슈 등 해당 자치단체를 연결해 분위기를 전했다. 유혁수 요코하마(?浜)국립대 국제사회과학연구원 교수는 일본이 강제 징용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과거와 다른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서울=유지혜 기자, 도쿄=이정헌 특파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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